진정한 힐링 여행을 위한, 사람을 위한 가방

[스페셜경제=이하림 기자]여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꿔봤을 명품(名品). 연간 5조원 규모로 추산되는 국내 명품 시장은 세계 5위권을 기록할 정도로 열기가 뜨겁다. 샤넬, 프라다, 루이비통, 에르메스 등 이들 브랜드를 모르는 이들은 없다. 특히 샤넬은 국내에서 ‘샤테크(샤넬과 재테크를 합한 말)’란 신조어가 생겼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하지만 정작 샤넬이 여성 해방의 아이콘이라거나 이브 생 로랑이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였다는 점. 심지어 대부분의 브랜드가 실제 디자이너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것도 모른다. 루이비통, 에르메스 등 왕족, 귀족이 소유했던 명품이 아닌 가난했던 코코 샤넬이 스스로 일군 브랜드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스페셜경제>에서는 연간 기획으로 유명 명품브랜드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 독자들께 전해주고자 한다. <편집자주>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 스타들의 공항 사진을 보면 꼭 등장하는 가방이 있다. 바로 루이비통. 명품 여행가방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브랜드다. 최근에는 일반인들도 많이 애용해 3초마다 한 번씩 볼 수 있다하여 ‘3초 백’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 인지도가 가장 높은 브랜드다. 현재 루이비통은 핸드백, 가죽 소품, 액세서리, 신발, 의류 등 여러 가지 제품을 제작, 판매하고 있지만 원래는 여행가방 전문브랜드로부터 시작됐다.
루이비통 가방이 신뢰를 받고 큰 인기를 얻게 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타이타닉호에서 유일하게 내용물이 젖지 않은 채 건져진 가방이라는 것이다. 1921년 4월, 영국 사우샘프턴항을 떠나 프랑스 셰르부르에 기항하고 다시 미국 뉴욕에 이르는 항로의 타이타닉호의 일등실 승객들은 루이비통 트렁크를 배에 실었다. 이후 배가 침몰하고 난파 해역에서 건져 올린 후 발견된 루이비통 가방에는 놀랍게도 물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지금까지 루이비통의 가방이 사람들로부터 더욱 인정받는 브랜드가 된 계기가 됐다.
타이타닉호 침몰에도 유일하게 젖지 않은 가방
세계 최초캔버스로 만든 사각형 트렁크 주목
귀족을 위한 여행가방 제작자
브랜드 루이비통의 창시자인 루이비통은 1821년 프랑스 동부 작은 마을의 목공소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자연스레 나무 다루는 법을 배웠다. 이후 아버지의 재혼으로 인해 14세의 어린 나이에 집에서 나와 파리로 향했다.
파리로 가던 루이비통은 여행가방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당시 귀부인들에게는 페티코드 위에 수십 미터나 되는 천을 늘어뜨리는 드레스가 유행이었는데, 여행을 할 때는 수십 개의 드레스를 나무상자에 담아 마차에 싣고 다녔다고 한다. 이런 장면을 지켜보던 루이비통은 드레스를 가득 담을 수 있는 여행용 고급 가방을 만들고 싶었다.
이를 계기로 유명 트렁크 제작자인 마레샬의 견습공으로 7년 동안 일하며 귀족들의 트렁크를 꾸리는 일을 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폴레옹 3세의 부인인 ‘유제니 왕후’가 먼 길을 떠나기 전 자신의 의상을 구김이 가지 않게 트렁크에 가득 담을 수 있는 사람을 데려오라 했다. 마침 그 능력을 갖춘 루이비통이 유제니 왕후의 눈에 띠었고, 유제니 왕후의 총애를 받았다.
왕후의 후원으로 1854년 마침내 프랑스 파리의 뤼뇌브 데 까푸신느 4번가에 자신의 여행가방 전문매장을 열었다. 당초 매장에는 ‘손상되기 쉬운 섬세한 물건을 안전하게 포장하며, 의류 포장에 전문적임’이라고 쓴 간판이 걸려 있었는데, 이것이 루이 비통 브랜드의 시작이다. 이때부터 시작된 루이비통 브랜드는 현재까지 150년간 5대에 걸쳐 사업이 이어지고 있다.
최초의 사각형 트렁크와 자물쇠
19세기 산업혁명과 더불어 철도 및 수로 교통의 발달로 인해 프랑스의 휴양문화가 발전했고, 여행이 활발해 졌다. 이 같은 사회 변화는 루이비통에게 큰 행운은 안기게 된다. 당시 여러 개를 쌓기 어려운 둥글고 무거운 여행용 트렁크는 공간이 좁은 철도나 배에 실어 나르기에 무척이나 불편했다. 루이비통은 이를 바꿔 기존의 나무 트렁크가 아닌 캔버스로 만든 사각형 모양의 트렁크 ‘그레이 트리아농 캔버스’를 개발했고, 이것이 최초의 사각형 트렁크가 됐다. 이를 왕후나 헤밍웨이 등 저명한 고객들이 사용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1886년에는 루이비통과 그의 아들인 조르주 비통이 획기적인 아이템을 개발하기도 했다. 트렁크를 안전히 보관할 수 있는 열리지 않는 자물쇠가 그것이다. 강도가 판치던 그 당시에는 획기적인 아이템이 아닐 수 없었다. 이와 함께 귀중품을 보관할 수 있는 여행객들의 트렁크도 선보였는데 이때 나온 게 '루이비통 다미에 캔버스'다.
조르주 비통의 새로운 도전
아버지로부터 가업을 이어받은 조르주 비통은 각종 아이디어를 접목시킨 트렁크를 만들며 부유층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영역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이후 1870년 프랑스는 트로이센 전쟁과 파리 혁명으로 재정이 악화되지만 전쟁 후에 수에즈 운하, 자동차 같은 새로운 교통수단의 탄생으로 여행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다. 따라서 사람들은 실용적인 디자인으로 간편하게 들고 다닐 수 있는 루이비통의 여행용 가방을 더욱 많이 찾았다. 이로써 여행용 가방에서 출발한 가방제품은 트렁크 슈트케이스, 소프트타입의 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디자인과 크기의 제품을 선보이는 명품 브랜드로 성장하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이때부터 루이비통은 역사적인 스페셜 오더 제품도 많이 제작했다. 1969년에는 아프리카 탐험을 떠나는 프랑스 탐험가 피에르를 위해 침대로 변신하는 트렁크,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가지고 다녔던 북케이스 트렁크 등을 선보이며 많은 화제가 됐다.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조르주 비통은 여성들의 로망인 핸드백을 제작함으로써 현재 루이비통의 모습을 만들었다.
모조품 방지 위해 생겨난 마크
루이비통의 원래 패턴은 줄무늬 캔버스였지만, 트렁크 제품이 점점 인기를 끌면서 모조품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조르주 비통은 이를 방지하고자 브라운과 베이지 컬러의 ‘다미에’, ‘모노그램’ 등을 연달라 런칭 시킴으로써 모조품과 차별화를 위해 노력했다.
1888년 조르주 비통은 모조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의 아버지 이름의 머리글자인 L과 V를 결합시켰고, 여기에 18세기 프랑스 미술가인 아르누보의 꽃잎현상을 합한 모양을 자사의 로고로 등록했다. 이때부터 오랜 트레이드 마크인 바둑판무늬가 등장하게 됐고,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루이비통 모노그램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모노그램 캔버스는 루이비통 제품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디자인으로 자리 잡았으며 오늘날 브랜드를 상징하는 독보적인 아이콘이 됐다. 또한 세계 최초로 제품에 마크를 도입하는 첫 번째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사람들이 조금 더 편리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루이비통. 패션을 위한 가방이 아닌 사람을 위한 가방으로 시작한 루이비통이기에 현재까지 가장 친근하면서도 믿음이 가는 명품 브랜드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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