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은 지나가도 스타일은 남는다”

▲ 가브리엘 샤넬(제공=뉴시스)

[스페셜경제=이하림 기자]여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꿔봤을 명품(名品). 연간 5조원 규모로 추산되는 국내 명품 시장은 세계 5위권을 기록할 정도로 열기가 뜨겁다. 샤넬, 프라다, 루이비통, 에르메스 등 이들 브랜드를 모르는 이들은 없다. 특히 샤넬은 국내에서 ‘샤테크(샤넬과 재테크를 합한 말)’란 신조어가 생겼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하지만 정작 샤넬이 여성 해방의 아이콘이라거나 이브 생 로랑이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였다는 점. 심지어 대부분의 브랜드가 실제 디자이너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것도 모른다. 루이비통, 에르메스 등 왕족, 귀족이 소유했던 명품이 아닌 가난했던 코코 샤넬이 스스로 일군 브랜드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스페셜경제>에서는 연간 기획으로 유명 명품브랜드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 독자들께 전해주고자 한다. <편집자주>


역경을 딛고 꿈을 찾아 최고의 디자이너가 된 샤넬
나치에 협력 비난‥‘매국노’ 비난에 스위스에서 망명


최근 많은 이들이 고가의 명품에 돈을 쏟는다. 때문에 전 세계 곳곳에서 어마어마한 숫자의 명품브랜드가 생겨났고, 그 가격은 적게는 수십 만원에서 많게는 수천 만원을 호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품은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그러나 브랜드의 역사 또는 디자이너에 대해서는 무지인 사람이 대부분이다. ‘샤넬’하면 고가의 핸드백과 향수 등이 생각 날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명품브랜드지만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브랜드. 돈 없는 사람이 ‘샤넬백’을 들면 ‘된장녀’ 소리를 듣지만, 여자라면 그런 말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정도로 하나쯤은 갖고 싶어 한다.


이처럼 샤넬은 명품의 대명사가 됐지만 샤넬의 창시자 ‘가브리엘 샤넬’이 처음부터 추구한 것은 고가의 패션 아이템이 아닌 편안함과 자유로움이었다.
▲ 사진=뉴시스
역경 딛고 꿈을 쫓다
샤넬은 1883년 8월19일 프랑스 남서부 소뮈르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12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에 의해 고아원에 맡겨졌다. 그곳에서 직업 교육의 일환으로 바느질을 배웠고, 이렇게 습득한 바느질 기술은 훗날 샤넬이 패션사업을 시작해 그녀의 패션 감각을 구체화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보육원 생활이 끝나고 샤넬은 낮에는 의상실 보조 재봉사로, 밤에는 술집에서 노래하며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다. 브랜드 샤넬의 상징인 ‘코코(로고)’는 이때 그녀가 불리던 애칭이다.
이후 샤넬은 1910년 프랑스의 재력가 ‘발장’의 도움으로 모자가게를 열었다. 샤넬은 위대한 여성이기도 하지만 성공하고 싶어 사랑의 감정을 이용했던 여자이기도 했다. 그녀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늙은 발장에게 다가갔다. 속물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여성이 독립하기 어려운 시대를 반영하는 부분이다.
샤넬은 그 당시 유행하던 복잡하고 화려한 모자가 아닌 단순하고 개성적인 모자를 선보여 파리의 여성들을 열광시켰고 그때부터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패션은 지나가도 스타일은 남는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여성들의 옷은 몸을 꽉 조이는 코르셋과 무거운 헤어, 한껏 부풀린 엉덩이, 발끝까지 닿는 긴 치마가 상징적이었다. 코르셋을 너무 죄어 호흡곤란으로 사망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여성이 ‘다리’를 드러낸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시대였다. 또 치마를 부풀리기 위해 착용했던 크리놀린(고래수염이나 말총으로 만든 커다란 새장 모양의 속옷)은 그 무게 때문에 활동하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샤넬은 이 같은 기존의 질서를 참을 수 없었다. 여성이 남성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이 아니라 자유롭고 존중받아야 할 ‘독립’된 개체로 여겨지기를 바랐다.
이로써 당시 여성들에게 샤넬은 패션으로서의 자유를 선사했다. 우선 코르셋과크리놀린을 벗게 했다. 이 때 나온 것이 바로 ‘샤넬라인’이다. 치렁치렁한 긴 치마를 무릎까지 잘라버리고 허리 라인을 허리 아래로 내린 패션계에서 가장 유명한 라인이다.
▲ 사진=뉴시스
남성의 전유물 바지를 ‘여성화’
또한 연인의 옷을 변형해 입길 좋아했던 샤넬은 남자들만의 전유물이었던 셔츠와 바지를 여성의 옷으로 탈바꿈시켰다. 남성들의 옷에만 사용되던 저지소재를 사용하기도 하고, 무겁고 화려한 장신구를 달지 않고 대신 주머니를 달면서 블랙과 화이트로 심플하면서도 편안한 의상을 만들었다.
게다가 그 당시 핸드백은 모두 손으로만 들어야하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샤넬은 처음으로 어깨 끈을 사용했다. 가방을 어깨에 메면서 여성들이 양손을 쓸 수 있게 됐고, 동시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같은 샤넬의 시도는 당시에는 가히 혁명이 아닐 수 없었다. 많은 여성들이 샤넬이 만든 옷을 입고 자신들의 몸을 구속하던 옷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움직이고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의상으로 돈방석에 앉게 된 샤넬은 향수도 개발했다. 이때 만들어진 것이 현재 향수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샤넬 No.5’다. 모든 유럽 여성이 샤넬의 드레스를 입고 샤넬 No.5를 뿌리고 다닐 정도로 전 유럽에서 사랑을 받았다.
‘배신자’ 낙인‥일흔살에 재기 성공
그러나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샤넬은 독일군 장교이던 ‘바론 한스 귄터 폰 딩클라게’와 사랑에 빠졌다. 그를 도와 나치에 협력한 샤넬은 전쟁이 끝나자 배신자자로 몰려 스위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게 됐다. 15년간의 스위스 생활을 접고 돌아오지만 파리에는 ‘크리스찬 디올’과 ‘발렌시아가’ 등 남성디자이너들이 접수하고 있었다. 그 뒤 1953년 일흔한 살로 다시 패션계로 돌아온 샤넬은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한다. 그 때 발표한 발꿈치가 드러나는 샌들과 검정색 드레스가 전통적인 샤넬 스타일로 불리고 있다.
▲ 사진=뉴시스
샤넬은 많은 여성들이 일상에서 자신의 옷을 입길 원했다. 때문에 마트에서 패션쇼를 열기도 했다. 또 지중해연안, 휴양지 생트로페, 베르사유 궁전 등에서 패션쇼를 진행했고, 모델들이 요트를 타며 등장하기도 했다.(요트는 럭셔리한 문화로 여겨지지만 프랑스에서는 가장 대중적이고 일상적인 공간이다.)
샤넬은 그녀가 만들어낸 옷이 기존의 관습을 추종하는 것이 아닌, 여성들은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를 추구하고, 무엇인가 적극적으로 하고 싶어 한다는 확신을 가진 것이다. 그래서 여성들을 위한 옷을 만들었고, 실제로 많은 여성들이 샤넬이 만든 옷을 입고 자신을 더 멋지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느낀다. 좀 더 자유로운, 당당한 하나의 인격체로서의 삶과 생활, 이것이 코코 샤넬이 꿈꾸었던 여성의 삶이 아닐까.
샤넬은 말했다. “패션은 단순한 옷의 문제가 아니다. 패션은 바람에 깃들어 공기 중에 존재한다. 사람들은 그것(패션)을 느끼고 또 들이마신다. 그것은 하늘에도, 길거리에도 존재한다. 그것은 생각, 격식, 사건에서 비롯된다”. 여성의 자유를 꿈꿨던 코코 샤넬이기에 현재까지도 샤넬은 명품 중에서도 독보적인 여성성을 강조하며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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