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의 부도옹(不倒翁), 고(故)정인영 회장의 한라그룹[1부]

김영일 / 기사승인 : 2014-08-15 09:23:25
쓰러지지 않는 오뚝이 정신‥“날 지켜준 건 9할의 역경”

▲ 정인영 회장에게 수여되는 창업대상을 대신 수상하는 한라그룹 정몽원 회장(사진제공 뉴시스)


[스페셜경제=김영일 기자]‘왕자의 난’, ‘형제의 난’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창업 도상에서 일어난 왕자들의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골육상쟁을 일컫는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형제의 난, 시숙의 난 등 ‘쩐’을 둘러싼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 2, 3세 경영으로 넘어오면서 지분을 더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왕에 오르기 위해서는 형제간의 피의 혈투가 있었다. 국내 재벌史에서는 시숙, 형제자매, 사촌, 남매를 비롯한 전쟁이 일어난 바 있다. 두산, 현대, 삼성, 금호그룹 등이 그 상처가 남아 있다. <스페셜경제>에서는 창업주의 사망 이후 벌어진 그룹 계승 전쟁, 일명 ‘쩐의 전쟁’을 기획 됐다. 여덟 번째로 故 정인영 창업주의 가문인 한라家에 대해 살펴봤다.


미군 통역하면서 현대건설을 키우는 발판 마련
왕 회장 부름으로 기자생활 청산하고 기업가로


한라그룹은 여전히 사람들의 머릿속에 한국 경제계의 거성으로 기억되는 현대그룹 고(故)정주영 명예회장의 바래 아랫동생인 고(故)정인영 회장이 창업한 회사이다. 정인영 회장은 ‘재계의 부도옹(不倒翁)’이라고 불렸다. 부도옹은 오뚝이를 가리키는 한자어이다. 정 회장이 왜 재계의 오뚝이로 불렸는지는 그의 성공과 시련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동아일보 기자로 출발


정 회장은 1920년 아버지 정봉식 씨와 어머니 한성실 씨 사이에서 정주영 명예회장에 이어 차남으로 태어났다. 정 회장은 지금의 한라그룹을 일궈냈지만 처음부터 사업에 관심이 있던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14세에 무작정 서울로 상경해 YMCA 야간 영어과를 2년을 다닌 뒤 일본 유학길에 오를 만큼 배움에 목말라 있었다.


일본 유학에서 고학(苦學, 학비를 스스로 벌어서 고생하며 배움)으로 아오야마학원 대학에서 야간으로 영어 배우기에 힘썼다. 이후 아오야마학원 대학 2학년 때 중퇴를 결심하고 한국으로 귀국해 동아일보에 입사해 기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당시 영어에 능숙했던 정 회장은 외국기관을 전담해 출입하는 외신부 기자로 열심히 기자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정주영 회장(이하 왕회장)과 함께 피난길에 오른다.


부산까지 내려간 정 회장과 왕 회장은 끼니를 해결하지 못해 배를 곯고 있던 중 우연히 미군 사령부 통역 모집광고를 접하게 된다. 이 모집광고는 왕 회장과 현대라는 그룹이 탄생하게 된 기틀을 마련하는 기회가 된다. 왕 회장의 ‘시련은 없어도 실패는 없다’는 자서전을 살펴보면 왕 회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인영이가 통역으로 취직하면 미군 식당에서 나오는 빵부스러기를 가져와도 먹는 것은 해결될 것이라면서 통역 취직을 했다”며 “아우(정 회장)가 공사라도 해서 밥을 먹어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공병대 장교 통역을 자원했는데 일이 뜻대로 잘 풀렸고, 공병대 일감을 현대건설에 연결해 줬다”고 쓰여 있다.


중공업 발전에 기여


이는 당시 현대건설이 미군의 공사를 싹쓸이 하면서 기업을 키울 수 있는 발판이 된 것이다. 이후 정 회장은 왕 회장의 부름을 받아 동아일보 기자생활을 청산하고 1951년 현대상운 전무로 입사하면서 본격적인 기업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정 회장은 형을 도와 현대건설의 기반을 닦아놓아 1953년 현대건설 부사장으로 승진한다. 이어 1961년 현대건설 사장에 취임하며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뛰어다니며 대형 건설 공사를 따내는 등 기업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정 회장은 해외 선진국들을 돌아다니며 중공업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자원의 부족한 한국은 중공업의 발전 없이 경제성장에 한계가 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이에 정 회장은 잘나가던 현대건설의 사장직급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1962년 현재 한라그룹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현대양행(현 두산중공업)’과 ‘만도기계’를 설립하면서 우리나라 중공업 발전에 기여하기 시작했다.


정 회장은 1964년 안양에 공장을 세우는 것을 시작으로 1972년에는 경기도 군포에 종합기계공장과 함께 주조공장을 잇따라 세우면서 국내 처음으로 굴삭기와 불도저, 덤프트럭 등 건설 중장비와 각종 산업설비, 공작기계 등을 생산했다.


또한 1976년 당시 단일 공장으로는 세계최대규모에 속했던 창원 종합기계공장 건설에 착수하면서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어 1977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지잔 시멘트 공사를 국내 최초 턴키베이스(설계·시공 일괄 입찰)로 수주했고 파라잔 담수화시설, SAFCO 황산공장 건설 수주에도 성공해 한국의 기업들이 중동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는 정 회장이 당시 불모지였던 한국에 중공업 발전을 위해 중공업 시장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현대양행 강탈‥중공업 왕국의 꿈은 그렇게 마감
차남에게 그룹 지휘권 넘겨…경영권 분쟁 발단


시련의 시작


이처럼 한국 경제계의 큰 획을 긋기 시작한 정 회장은 1980년 전두환 정권의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시련이 찾아왔다. 전두환 정권의 신군부는 중화학공업의 난립을 재편한다는 명분과 투자 조정이라는 명목아래 정 회장을 파렴치한 기업인으로 몰아세우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신군부가 통치권을 확립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의 발전설비제작 통합정책으로 현대양행 창원공장을 신군부에 빼앗기고 말았다.


정말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전두환 정권은 정 회장의 현대양행을 권력을 이용해 빼앗은 것이다. 정 회장의 자서전 ‘재계의 부도옹 雲谷(운곡) 정인영’에는 당시 심정에 대해 “국보위를 내세워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신군부는 80년도에 중화학공업 투자 조정에 대해서도 초법적인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다”며 “보이지 않는 강력한 세력에 의해 현대양행 경영권 장악 시나리오가 진행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80년 7월 4일과 7일 두 차례에 걸쳐 산업은행과 외환은행이 220억 원의 차입금을 현대양행의 출자금으로 전화시키는 조치를 취했다”면서 “이로 인해 나의(정 회장) 현대양행 출자분은 42%로 줄어들었다”고 회고했다. 이와 관련 자서전에는 “1980년 11월 11일, 현대양행은 영원히 내 곁을 떠났다. 현대양행을 통한 중공업 왕국 실현의 꿈은 그렇게 마감되었다”고 적혀 있어 정 회장이 당시에 얼마나 비통한 심정이었는지를 반영하고 있다.


이듬해 1981년 4월에는 신군부가 정 회장에게 업무상횡령 및 특별배임죄, 외환관리법위반혐의를 덮어 씌어 억울하게 구속된다. 다행히도 구속 열흘 만에 혐의 없음으로 수사가 종결되어 풀려나게 된다. 하지만 정 회장은 신군부의 조작으로 국민들에게 부도덕한 기업인으로 낙인이 찍혔으며 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진 만도기계와 원목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한라자원, 해운사업부인 한라해운, 인천조선, 한라시멘트 등 5개 회사만 남겨지게 되었다.


배나무 골 신화창조


정 회장의 오뚝이 정신은 여기서부터 발휘된다. 정 회장 최고의 작품인 현대양행을 강탈당한 이후 정 회장의 재기를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정 회장은 굳은 마음을 먹고 임원 4명, 사원 14명과 함께 압구정동 배나무 밭 사이에 있는 자신의 자택을 본부로 삼아 재기를 위한 도전을 시작했다.


정 회장은 수익성이 좋은 한라해운을 바탕으로 파푸아뉴기니의 원목개발을 시작하면서 재기의 발판을 삼았으며 1980년대 자동차 산업의 호황과 맞물려 자동차 부품을 제조하던 만도기계가 성장을 거듭해 정 회장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했다.


또한 인천조선 역시 조수간만의 차가 큰 갯벌로 인해 도크(DOCK, 선박을 건조·수리하기 위해서 조선소·항만 등에 세워진 시설) 설치가 불가능하다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플로팅 도크(Floating Dock, 해상에서 선박을 건조할 수 있도록 고안된 바지선 형태의 대형 구조물)방식을 도입해 조선업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중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이어 1984년에는 옥계시멘트공장을 증설하며 한라시멘트를 국내 최대 규모의 시멘트 기업으로 성장시켰고 1989년에는 한라그룹 사옥을 완공하면서 완벽하게 재기에 성공했다. 그러나 하늘은 정 회장의 재기를 시샘이라도 한 것인 냥 1989년 7월 정 회장은 잠자리에서 일어나다가 갑자기 뇌졸중(중풍)으로 쓰러지고 만다.


▲ 한라그룹(네이버 거리뷰)


이는 또다시 정 회장에게 시련이 닥쳐온 것이다. 이에 재계 안팎에서는 건강상태에 대한 걱정에 앞서 정 회장의 기업경영도 여기서 멈출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정 회장은 이번에도 여론의 시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한국과 일본에서 재활치료를 받으며 더욱더 활발한 경영활동을 이어나갔다.


휠체어를 타고 한라자원의 파푸아뉴기니 원목개발 현장을 찾는 등 뉴욕, 모스크바, 파리, 브라질 등 세계 각국을 누비고 다녔다. 이어 잃어버린 현대양행을 뛰어넘는 중공업 기업을 구축하기 위해 삼호조선소를 설립했다. 1990년 전남 영암군에 설립된 한라중공업 삼호조선소는 당시 모든 공정을 컴퓨터로 진행하는 최첨단 조선소였다.


이어 1991년 기업인 최고의 영예라 할 수 있는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함으로써 전두환 정권 시절 잃어버린 기업가의 명예를 되찾았다. 1996년에는 한라그룹이 국내 재계순위 12위에 올라서는 기염을 토하며 재계를 놀라게 했다.


이러한 과정들은 그야말로 정 회장의 오뚝이 정신을 제대로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를 지켜본 재계나 이러한 소식을 언론을 통해 접한 국민들은 하나같이 정 회장을 가리켜 ‘재계의 부도옹’이라 입을 모아 말한다.


▲ 고(故) 정인영 회장의 흉상(사진제공 뉴시스)


정 회장은 온갖 시련 속에서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재기를 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나를 지켜준 것은 9할이 역경이었다. 숱한 역경과 고비를 낙관주의를 통해 극복할 수 있었다”고 자서전을 통해 밝혔다.


이처럼 오뚝이 정신의 대명사로 통하는 정 회장은 1997년 1월 차남 몽원씨에게 한라그룹의 경영권을 넘겨주게 된다. 당시 재계에서는 그룹의 경영권은 장자에게 승계하는 원칙이 주를 이뤘던 시기였다. 그러나 정 회장은 장남 몽국씨를 제치고 차남에게 경영권을 쥐어준 것이다. 이는 한라그룹의 경영권을 둘러싼 분쟁을 예고하는 발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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