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가 사랑한 펜디 fur

[스페셜경제=이하림 기자]여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꿔봤을 명품(名品). 연간 5조원 규모로 추산되는 국내 명품 시장은 세계 5위권을 기록할 정도로 열기가 뜨겁다.


샤넬, 프라다, 루이비통, 에르메스 등 이들 브랜드를 모르는 이들은 없다. 특히 샤넬은 국내에서 ‘샤테크(샤넬과 재테크를 합한 말)’란 신조어가 생겼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하지만 정작 샤넬이 나치 스파이였으며, 코드명은 ‘웨스트민스터’라는 사실과 ‘이브 생 로랑’이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였다는 점. 심지어 대부분의 브랜드가 실제 디자이너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것도 모른다. 루이비통, 에르메스 등 왕족, 귀족이 소유했던 명품이 아닌 가난했던 코코 샤넬이 스스로 일군 브랜드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스페셜경제>에서는 연간 기획으로 유명 명품브랜드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 독자들께 전해주고자 한다. <편집자주>
영화 ‘에비타’의 마돈나, ‘로열 테넌바움’의 기네스 펠트로가 입었던 펜디의 모피코트는 여성들에게 ‘겨울의 로망’이 되었다. ‘순수의 시대’에서 미셀 파이퍼가 입고 등장하는 코트는 94년 아카데미 의상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서 소프라노 카바이반스카가 입은 핑크 퍼(fur) 망토는 펜디의 역사를 상징하는 작품으로 남는다.
할리우드 스타들부터 전세계 로열 패밀리들이 입고 있는 모피코트에는 언제나 팬디 라벨이 붙어있다. ‘펜디=모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펜디의 모피제품은 예나 지금이나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과거 모피코트는 부를 상징하며 ‘크고 무거우며 눈에 띄어야 한다’는 공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러한 개념은 펜디가 모피에 대한 혁신을 일으키면서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나이든 여성의 ‘상징’에서 젊고 ‘트렌디함’으로 재해석
헐리웃 셀럽들이 사랑한 ‘Must have item’ 바게트 백
1925년, 펜디의 시작
1918년 이탈리아 태생의 아델레 카사그란데는 당시 로마 중심가에 가죽과 모피 전문점을 열었고, 1925년 에두아르도 펜디와 결혼한 뒤 남편의 성을 따서 가게 상호를 펜디로 바꿨다. 이것이 브랜드 펜디의 시작이다.
이들 부부가 운영하던 펜디 부띠끄는 당시 1차 세계 대전 이후 산업화의 시기를 거치며 수제품을 선호하는 중산층이 늘어나던 시기에 서립됐는데, 가방과 모피 제품들의 품질과 디자인적인 감각을 인정받고 부르주아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여기에 힘을 얻어 펜디는 30~40년대에 급성장할 수 있었다.
이후 1962년부터 오트 쿠틔르와 기성복 제조업체에 가죽과 모피 제품을 공급하기 위해 컬렉션을 개최하고, 영화관을 인수해 펜디 매장으로 새롭게 개장하는 등 사업을 확장했다. 가죽, 모피, 신발, 지갑, 기성복 다섯가지 제품을 취급한 이 펜디 샵이 바로 펜디 플래그 스토어다.
펜디를 진화시킨 ‘칼 라거펠트’
1965년부터 펜디는 천재적인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와 인연을 맺으면서 한 층 더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칼 라거펠트는 무겁고 투박한 모피를 자르고 염색하는 등 다양한 작업을 통해 착용하기 좋은 가벼운 모피코트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펜디의 더블 F 로고는 칼 라거펠트가 만들 ‘Fur Fur’ 로고에서 차용해 만들어진 것으로, 그만큼 그가 모피에 쏟은 열정을 짐작할 수 있다.
60~70년대 급진적인 사회 변화와 함께 모피는 부르주아의 유물 취급을 받는 촌스러운 옷으로 전락하면서 거대한 모피코트는 나이든 여성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이 같은 시대의 변화에 칼 라거펠트는 소재와 패턴, 마감, 색상 등에서 새로운 시도를 선보였다. 품질이 낮고 의류용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진 다람쥐·두더지·토끼털을 사용하기도 했다. 전통적인 고급 모피였던 여우·흰담비·밍크털은 새로운 가공법과 염색을 통해 패셔너블하게 재탄생하게 됐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펜디
칼 라거펠트는 펜디의 고급 모피 라인의 디자인을 맡았고, 그의 첫 컬렉션은 패션 관계자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현재까지도 펜디를 이끌어가고 있는 칼 라거펠트는 다양하고 새로운 재단법을 이용해 새롭고 혁신적인 모피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색상의 모피제품을 선보이며 모피라고 하면 단연 펜디를 떠올릴 만큼 펜디의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펜디의 모피 역사에서 또 하나 주목할만한 점은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맞춤서비스다. 60년대 펜디 고객들은 자신이 원하는 모피 펜트를 직접 고르고 자신이 직접 새긴 사인이 담긴 모피를 입을 수 있었다. 이는 단 한 사람만을 위한 개인 서비스인 펜디의 ‘셀러리아 메이드 투 오더’(Selleria made to order)를 탄생시킨 배경이기도 하다.
클러치 백의 원조 ‘바게트 백’
길거리를 걷다 보면 보통 핸드백보다 작은 가방을 옆구리에 메고 다니는 여성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997년 바게트를 겨드랑이 사이에 끼고 바쁘게 움직이는 프랑스 파리인들의 모습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든 ‘바게트 백’이다. 펜디의 바게트 백은 소피아 로렌, 마돈다, 샤론 스톤, 엘리자베스 헐리 등 할리우드 유명 스타들이 애용하면서 패션계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Must have item)이 되었다.
하지만 바게트 백은 재미있는 이름과는 달리 자그마치 3개월 전에 예약을 해야만 살 수 있다. 작아서 실용적이지도 않고 비싼 가격 때문에 프라다의 백팩처럼 대중적이지도 않은 이 백이 열광적으로 사랑받는 이유는 장인들의 수공예 제품이라는 점 때문이다. 하루에 5cm밖에 생산할 수 없는 최고급 실크에서부터 다이아몬드 장식까지 정교함과 호화로움을 무장한 바게트 백은 명품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열광하게 했다.
펜디의 창시자 아델레 카사그란데와 에두아르도 펜디의 손녀인 펜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실비아 벤추리니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모피 공방은 로마 본사 맨 꼭대기 층에 있다. 그만큼 가장 중요한 위치라는 얘기다. 우리 장인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늘 실험적이고, 늘 열린 태도를 갖췄다. 무엇보다 ‘불가능한 것은 없다’라는 우리의 모토를 그대로 따르는 자들이다.”

기사 속의 기사
펜디는 지난 2001년 ‘펜디코리아’ 한국지사를 설립했으며 Fendi International S.A.가 100% 지분을 가지고 있다.
2012년 매출은 308억원, 2013년 매출은 296억원(2013년 분기보고서 기준)을 기록했다.
지난 2011년 서울시와 펜디는 때 아닌 ‘모피 갈등’을 벌였다. 서초구 반포동 세빛둥둥섬에서 예정된 펜디의 아시아 최대 규모 가을·겨울(F/W) 패션쇼를 앞두고, 서울시가 “동물애호단체의 반대로 모피 의상을 빼지 않으면 쇼 허가를 취소하겠다”고 펜디에 통보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패션쇼 당일 동물보호단체 등은 행위극과 시위를 펼치며 팬디의 모피 패션쇼에 대해 강하게 규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펜디는 일부 계층에게만 초대권을 발부하며 행사를 예정대로 진행하는 해프닝도 겪은 바 있다.



저작권자 © 스페셜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