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럽들이 사랑한 버킨백, 캘리백‥‘스타일과 부’의 상징

[스페셜경제=이하림 기자]여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꿔봤을 명품(名品). 연간 5조원 규모로 추산되는 국내 명품 시장은 세계 5위권을 기록할 정도로 열기가 뜨겁다.


샤넬, 프라다, 루이비통, 에르메스 등 이들 브랜드를 모르는 이들은 없다. 특히 샤넬은 국내에서 ‘샤테크(샤넬과 재테크를 합한 말)’란 신조어가 생겼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하지만 정작 샤넬이 나치 스파이였으며, 코드명은 ‘웨스트민스터’라는 사실과 ‘이브 생 로랑’이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였다는 점. 심지어 대부분의 브랜드가 실제 디자이너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것도 모른다. 루이비통, 에르메스 등 왕족, 귀족이 소유했던 명품이 아닌 가난했던 코코 샤넬이 스스로 일군 브랜드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스페셜경제>에서는 연간 기획으로 유명 명품브랜드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 독자들께 전해주고자 한다. <편집자주>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현빈이 했던 대사를 기억하는가. “이태리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든 옷이야!”. 드라마 속에서나 나올법하지만 프랑스 장인이 한 땀 한 땀 손수 제품을 만들어내는 브랜드가 실제로 존재한다. 이름만으로도 전 세계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브랜드 ‘에르메스’다.
에르메스는 모나코 여왕이자 할리우드 배우 그레이스 켈리가 애용한 ‘켈리백’과 프랑스 가수 제인 버킨으로 인해 만들어진 ‘버킨백’, 최초의 지퍼 가방 ‘볼리드백’ 등 이름만 들어도 황홀한 가방들을 만들어냈다.
에르메스 가방은 구입하지는 못해도 만지기만이라도 해보고 싶을 정도의 매력을 가진 전 세계 여성의 로망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에르메스의 가방은 대량생산을 하지도, 재고가 남지도, 세일을 하지도 않아 돈이 있어도 구입하기 힘든 가방으로 유명하다.
에르메스는 그만큼의 가치를 지녔다. 가방의 경우 주문이 들어오면 프랑스 장인이 한 땀 한 땀 공들여 만들기 때문에 일주일에 2개 정도밖에 제작하지 못한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내면 편리하고 돈을 끌어 모으겠지만 에르메스는 설립 당시 마구용품을 손수 만들던 장인정신을 고수하고 있다. 때문에 다른 명품 브랜드와 달리 주식회사에 소속되지도 않았으며, 6대에 걸쳐 가족기업으로 에르메스 브랜드를 이어오고 있다.
일주일 2개만 생산…제고·세일 없는 브랜드
25초에 한 장씩 팔리는 실크 스카프 ‘카레’
마구상에서 시작된 에르메스
에르메스 브랜드의 창시자 티에리 에르메스는 독일의 크레펠트에서 태어나 종교적인 이유로 프랑스로 망명해 정착했다. 피혁공이었던 티에리 에르메스는 1837년 파리의 마들렌느 광장에 마구용품을 파는 작은 가게를 열었다. 그는 당시 주요 교통수단이었던 마차를 끄는 말에 필요한 모든 용구와 장식품을 직접 수공으로 제작해 팔았다.
마구상을 운영하던 어느 날 프랑스 왕의 아들(오를레앙 공작)이 타고 가던 마차에서 떨어져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안장이 말을 찌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프랑스 귀족들은 마구 용품의 중요성을 느끼고 장인정신으로 마구용품을 만드는 에르메스의 마구상은 유명세를 타게 된다.
1867년에는 그의 마구 제품이 세계박람회에서 견고성과 가벼움으로 최고상을 수상하기도 할 만큼 인정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에르메스는 마차 대신 자동차를 이용하는 시대가 오자 최급 품목을 여행가방과 여성용 핸드백, 서류가방 등으로 사업을 빠르게 전환시켰다.
1879년 티에리 에르메스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샤를르 에밀 에르메스가 가업을 물려받는다. 그는 파리의 포부르 쌩 또노레 24번가로 가게를 옮겨 확장했는데, 그 곳이 지금까지 같은 자리에서 160년이 넘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매장이 됐다. 당시 에르메스는 19세기 말 유럽의 왕실과 귀족들,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스 2세, 일본의 군주들까지도 주 고객이었을 그만큼 프랑스 전통의 대표적인 명품 브랜드인 동시에 세계 최고의 피혁 브랜드로 꼽혔다.
지퍼가 달린 최초의 가방 ‘볼리드백’
1902년 샤를르 에밀 에르메스가 은퇴하고 그의 둘째 아들이자 에르메스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에밀 모리스가 경영을 이어받는다. 에밀 모리스는 사업차 뉴욕과 캐나다에 갔다가 캐딜락 자동차의 지퍼를 보게 된다. 이후 지퍼를 가지고 프랑스에 돌아와 자동차 이외의 모든 지퍼에 대한 소유권을 갖는다.
이를 가방에도 달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볼리드 백, 1923년 프랑스에서 처음 선보인 볼리드 백은 세계 최초의 지퍼가 달린 가방이다. 자동차 브랜드 ‘부가티’와 협업해 만들어져 부가티라고도 불렸다.
그레이스 켈리가 사랑한 ‘켈리백’
에르메스의 가죽 제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모나코의 여왕이자 여배우 그레이스 켈리의 이름을 따 만든 ‘켈리백’이다.
켈리백의 원래 이름은 ‘프티 삭 오트백’이었다. 1935년 처음 선을 보인 프티 삭 오트백은 승마용 안장과 액세서리를 보관하는 용도로 만들어졌다.
베이지 색상에 넉넉한 사이즈의 이 가방은 1950년대 그레이스 켈리가 즐겨 들면서 인기를 얻었다. 그레이스 켈리는 이 가방에 반해 여러 색상으로 6개나 주문을 할 정도였다. 당시 임신 중이었던 그레이스 켈리는 볼록한 배를 가리기 위해 에르메스 가방을 들고 다녔고, 그녀가 가방을 들고 있는 사진이 미국잡지 ‘라이프’에 실리면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다.
탈부착이 가능한 숄더 스트랩이 있어 도트백과 숄더백 두 가지로 활용할 수 있는 실용성을 갖춤으로써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 가방은 많은 사람들에게 켈리백으로 불리며 사랑을 받았다. 이후 에르메스가 모나코 왕실에 직접 찾아가 가방의 이름을 ‘켈리백’으로 바꿔도 되는지 허락을 받았다.
그때부터 켈리백은 오늘날까지 최고의 가방으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는 6가지 정도의 다양한 크기와 가죽, 색상으로 발표되고 있으며, 특히 제한된 수량으로 판매되고 있다.
제인버킨에 의해 탄생한 ‘버킨백’
에르메스 가방의 또 하나의 효녀 아이템 버킨백. 에르메스의 5대 회장 장 루이 뒤마 에르메스는 우연히 비행기 옆자리에서 영국 출신의 프랑스 샹송 가수 겸 배우인 제인 버킨을 만나게 된다. 평소 편안하고 자유분방한 스타일을 즐겼던 버킨의 밀집소재 가방 안에 물건이 뒤죽박죽 되어있는 것을 보고 에르메스는 물건과 수첩을 넣을 수 있는 포켓을 내부에 붙이고 켈리백보다 큰 가방을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현재 전 세계 스타들과 유명 인사들이 즐겨 매는 버킨백이다.
25초에 한 장씩 팔리는 스카프 ‘카레’
그렇다고 에르메스가 ‘가방’만 유명한 것은 아니다. 대표적 아이템이 바로 스카프. 1937년 군인의 손수건에서 영감을 받아 승마용 블라우스에 쓰이던 실크로 만든 스카프 ‘카레’는 최고급 품질의 실크와 주로 재갈, 안장, 채찍 등이 전면에 인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프린트 작업은 수작업을 통해 정교하게 인쇄되면 스카프의 가장자리는 직접 속으로 감침질 돼 있다.
전 세계적으로 25초에 한 장씩 팔리는 스카프 카레는 프랑스어로 정사각형이란 뜻으로 말 그대로 90cm 정사각형 형태를 이룬다. 또 이 스카프 한 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250마리의 누에고치가 필요하다고 한다. 1937년 이래로 약 2만5000개의 독특하고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스카프가 탄생했으며, 현재는 매년 두 종류의 새로운 스카프 컬렉션을 발표하고 있다.
로고 ‘깔레쉬’와 오렌지 상자
에르메스 브랜드의 로고는 에밀 에르메스의 사위 ‘로베르 뒤마’가 만들었다. 에르메스의 가업을 이어받은 로베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로고 제작이었다. 프랑스어로 마차라는 뜻을 가진 ‘깔레쉬’를 상표로 등록했다. 마구상에서 시작한 브랜드 역사를 로고에 담은 것이다.
특히 이 로고는 에밀 모리스 에르메스가 수집한 프랑스 화가 ‘알프레드 드 드로’의 19세기 석판화 ‘르 뛰끄 아뗄’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림 속에는 당시 귀부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뒤끄’라는 고급 마차가 마부 석이 빈 채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 그림을 활용한 에르메스 로고는 에르메스가 고삐를 조정할 고객을 기다리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또한, 에르메스 하면 제일 먼저 오렌지색이 생각난다. 그만큼 오렌지색은 에르메스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르메스의 제품을 담는 상자는 원래 크림색이었다. 당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자원이 부족했고, 크림색상자는 구할 수 없었기에 대신 남아돌던 오렌지색 상자를 사용한 것이다. 당시 프랑스에서 오렌지색은 금기된 색, 저주받은 색으로 천한 계급의 색깔로 취급되면서 색의 이름조차 없었다. 하지만 이 선택은 탁월했다. 천연 오렌지색 종이는 에르메스 제품에서 중요한 천연 가죽의 질감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했고 에르메스를 상징하는 시그니처 아이템이 됐다.
에르메스는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전통적인 수작업 제조 과정을 고수하는 것을 브랜드의 원칙으로 삼고 있다. 때문에 아무리 주문이 쇄도한다고 해도 철저히 소량 생산만을 고집한다. 이는 하나의 예술품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전통과 철저한 장인정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같은 노력과 브랜드 철학으로 인해 에르메스는 전 세계에서 ‘진정한 명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기사 속 기사>

명품업계 ‘다윗’ 에르메스가 ‘골리앗’ 엣헤네시·루이비통(LVMH)과의 ‘핸드백 전쟁’에서 승리했다.


LVMH는 오랫동안 탐내던 에르메스의 지분을 야금야금 사들여 에스메스 가문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지분을 보유했다. 이후 LVMH의 인수합병을 목적을 눈치 챈 에르메스는 2012년 9월 LVMH가 자사 주식을 매입하기 위해 내부자 거래 등 불법행위를 동원했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기존 전문 경영인 체제에서 다시 가족 경영체제로 복귀했다.


이에 LVMH는 단순 투자목적이었다고 부인했지만, 지난해 프랑스 시장규제위원회(AMF)는 LVMH가 에르메스 주식을 매입하기 이전에 정보를 공개하지 않아 시장을 교란시켰다며 800만유로(약 107억원)의 벌금을 부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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