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후유증 날려버린 천재적 디자인 ‘뉴룩’‥왜 주목하는 가

[스페셜경제=이하림 기자]여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꿔봤을 명품(名品). 연간 5조원 규모로 추산되는 국내 명품 시장은 세계 5위권을 기록할 정도로 열기가 뜨겁다.


샤넬, 프라다, 루이비통, 에르메스 등 이들 브랜드를 모르는 이들은 없다. 특히 샤넬은 국내에서 ‘샤테크(샤넬과 재테크를 합한 말)’란 신조어가 생겼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하지만 정작 샤넬이 나치 스파이였으며, 코드명은 ‘웨스트민스터’라는 사실과 ‘이브 생 로랑’이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였다는 점. 심지어 대부분의 브랜드가 실제 디자이너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것도 모른다. 루이비통, 에르메스 등 왕족, 귀족이 소유했던 명품이 아닌 가난했던 코코 샤넬이 스스로 일군 브랜드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스페셜경제>에서는 연간 기획으로 유명 명품브랜드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 독자들께 전해주고자 한다. <편집자주>
‘가십걸’의 블레어와 세레나,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앤디가 들고 나온 가방. 사치 좀 부린다 싶은 드라마나 영화에는 꼭 등장하는 ‘크리스챤 디올’. 루이비통과 프라다 등과는 달리 월급쟁이들이 감당하기에는 가격이 만만치 않아 TV에서만 눈에 띄는 브랜드다.
그도 그럴 것이 디올의 가방은 영국의 다이애나 비가 즐겨 메던 가방이었다. 프랑스 영부인 마담 시크라가 다이애나 비에게 당시 디올의 ‘슈슈백’을 선물해줬고, 다이애나 비는 이후 공식석상에는 항상 슈슈백을 메고 나왔다. 이때부터 슈슈백은 현재 크리스챤 디올 중 패션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가방인 ‘레이디 디올’로 이름이 바뀌었다. 영부인이 선택한 가방. 전 세계 여성들의 ‘워너비백’이 될 만한 자격이 충분하지 않은가.
하지만 크리스챤 디올이 처음 여성들을 설레게 한 것은 가방이 아니었다. 바로 드레스다. 디올은 전쟁으로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피폐해진 여성들에게 꽃 같은 옷을 선물했다. 디올의 옷을 입고 여성들은 몸과 마음에 풍요를 느꼈다. 이것이 여성을 한 송이 꽃으로 디자인한 세기의 로맨티스트 크리스챤 디올의 탄생이다.
“나는 여성을 안다. 결국 여자다운 옷에 매혹된다”
옷에 몸을 맞춰야 하는 건방진 옷 ‘크리스챤 디올’
많은 디자이너들이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보낸 것과 달리 크리스챤 디올은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 1905년생인 디올은 프랑스 노르망디 그랑빌에서 태어나 예술적 감각이 넘치는 파리에서 문화를 즐기면서 커왔다. 외교관이 되기를 원한 부모님의 바람으로 강제적으로 정치학을 전공했지만 건축과 예술에 깊은 흥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디올은 결국 정치학에 대한 학위를 받지 못한 채 학교를 그만 둔다.
그러다 1930년 공황 때 아버지의 파산 이후 오트 퀴트르 샵에 드레스나 모자 일러스트를 팔아 돈을 벌던 중 로버트 피제의 부티크에서 보조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하게 된다. 1941년에는 뤼시앵 를롱의 부티크에서 피에르 발망, 지방시와 함께 일하기도 했다. 이후 1946년 당시 섬유업계의 거물 마르셀 부삭의 지원으로 39세의 나이에 파리 몽테뉴 30번가에 그의 이름을 건 오트 쿠튀르 하우스를 오픈한다.
‘전쟁 후유증’ 물리친 세기의 디자인 ‘뉴룩’
당시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 후 절제된 디자인, 단순한 칼라, 평범한 옷감으로 생활해야 했다. 절약은 애국을 뜻하던 시대였고 풍성한 드레스나 화려한 패션은 배척의 대상이었다. 또 단조롭고 남성적인 복장이 유행이었고, 샤넬의 영향으로 여성의 S라인을 강조하는 것은 천박한 스타일로 매도되던 시기였다. 하지만 차츰 여성들도 새로운 스타일을 찾기 시작했다. 사치스러움과 트렌디에 대한 열망이 자라난 것이다. 그 즈음에 샤넬의 은퇴로 파리 패션계는 공황상태를 맞는다.
이때 크리스찬 디올의 첫 컬렉션에서 뉴룩으로 불리게 되는 ‘코롤라’를 발표한다. 꽃부리(Corolle)와 8(Huit) 두 개의 라인에 90벌이 넘는 디자인을 선보였고, 여성스러움을 강조한 실루엣은 수많은 패션지의 찬사를 받았으며 여성 패션을 완전히 뒤바꿨다.
비스듬하게 떨어지는 어깨라인과 부서질 듯 얇은 허리, 종아리에서 꽃잎처럼 퍼지는 풍성한 스커트의 주름은 그야말로 여자들의 옷이 무엇인지를 보여줬다.
당시 꽃부리를 엎어놓은 듯한 디자인인 디올의 코롤라는 미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당시 미국 패션잡지 하퍼스 바자의 편집장인 카멜스노우가 ‘New Look'이라고 말한 것을 계기로 지금까지 뉴룩으로 불리고 있다.
혜성처럼 나타난 뉴룩은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풍성한 주름, 화려한 장식, 리본과 자수 등은 풍요를 꿈꾸던 전후 사람들의 상상력을 충족시켜 주었고, 둥글고 단정한 어깨, 다시금 강조된 허리라인과 아랫단이 넓은 치마는 의상의 새로운 혁신으로 여겨지게 된다.
여성을 잘 이해한 디자이너
당시 디올이 이처럼 화려한 디자인에 몰두한 이유는 시대적인 요구와 그 당시의 분위기에 대한 반발이 가장 큰 이유였다. 전쟁으로 침체되고 피폐한 분위기에 디자인으로 하여금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싶었다. “우리는 복싱 선수만큼이나 건장한 체격에다 제복을 입은 여군들로 가득 찬 전쟁 시대에서 벗어나고 있다. 나는 꽃 같은 여성들을 디자인했다(디올 비망록 中)”
또 그는 여성의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을 가장 잘 이해한 디자이너다. “나는 여성을 안다. 여자들은 결국 여자다운 옷에 매혹된다”라고 말하며 디올은 전쟁과 사회적 성향으로 인해 억제되어 있던 여성의 심리가 시간이 흘러 화려하게 변할 것을 정확히 예측했다.
디올은 뉴룩 이후에도 튤립라인, H라인, A라인, Y라인, 애로 라인 등을 발표하면서 세계의 패션을 이끌었다. 또 여기에 멈추지 않고 시계, 화장품, 가방, 신발, 아이웨어 등까지 다양한 패션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칭송받는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어머니와 누이들의 영향으로 탄생한 옷
그의 첫 컬렉션은 화관을 뜻하는 ‘코롤라(Corolla)'였다. 실제로 집안에 꽃향기가 가득하게 꽃을 채울 정도로 유복한 삶을 보낸 디올은 한마디로 부르주아였다. 그의 어머니와 누이들은 비싼 우트 쿠튀르 옷을 입고 각종 악세사리를 항상 두르고 있었다. 때문에 디올에게 여성은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디올은 남성이지만 어릴 적부터 좋은 옷을 입으면서 감각이 섬세하게 변했다. 명품을 써본 사람만이 명품의 가치를 안다는 말이 있다. 유복한 어린시절 영향인지 디자인을 할 때도 유독 과감한 투자를 많이 했다. 디올이 활동했던 시절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였기 때문에 전세계가 경제적으로 어려웠었다. 때문에 당시 디자이너들은 천을 아끼는 쪽으로 디자인을 해 낭비를 줄이려고 했지만 디올은 전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주간 드레스는 기본 20마 이상을 사용했고 이브닝 드레스는 무려 42마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는 다른 디자이너들의 몇 십배 이상을 사용, 화려함을 추구했다.
입고 싶은 자, 옷에 맞는 몸을 만들어라
그리스챤 디올의 옷은 마치 건축물처럼 견조한 골절을 갖추고 있다. 패티코트, 미니코르셋, 엉덩이패딩, 보디스, 스커트안감. 이처럼 견고한 구성으로 디자인한 의상은 몸에 꽉 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옷을 입기 위해 여성들은 다이어트를 해야만 했다. 옷에 맞는 옷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옷에 몸을 맞추도록 하는 건방진 디자이너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의 패션에 열광했다.
이는 남성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2000년 디올은 에디슬리먼을 디자이너로 영입해 남성패션에 혁명을 일으켰다. 허리를 바짝 조인 실루엣과 하체의 윤곽을 들어낸 스키니라인이 등장한 것이다. 그의 독보족인 스타일은 남성들의 패션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며 전 세계를 열광시켰고 깡마른 모델들이 입고나온 스키니핏을 소화하기도 해 옷 좀 입는다는 남자들의 다이어트가 시작됐다.
20세기 후반 가장 영향력 있는 패션 디자이너로 알려진 칼 라거펠트는 일흔의 나이를 앞두고 디올의 스키니 라인을 입기 위해 18개월간 42kg나 감량하는 죽음의 다이어트를 불사하기도 했다.
‘패션계의 거장’으로 불리는 크리스찬 디올이 자신의 브랜드를 운영한 기간은 고작 10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찬 디올이 지금까지 명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이유는 그 짧은 기간 동안 그는 프랑스 패션계의 유행을 주도했으며 혁명적인 디자인 뉴룩을 비롯해 의복의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패션은 꿈에서부터 나오고, 꿈이란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이다” -크리스챤 디올-

크리스챤 디올은 지난 1997년 6월 13일 ‘크리스챤 디올 꾸뛰르 코리아’ 한국지사를 설립했으며, 프랑스 기업인 Christian Dior Couture S.A가 100% 지분을 가지고 있다.


2012년 매출은 294억원, 2013년 매출은 311억원(2014년 분기 보고서 기준)을 기록했다.


디올 등 럭셔리 브랜드들이 이 같은 실적 부진을 겪고 있는 이유는 불황과 함께 고객들이 해외 직접구매와 병행수입 등 제품을 저렴하게 살 수 있는 채널로 눈을 돌리는 한편 새로운 명품을 찾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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