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들 만나 검증…“北은 주체사상도, 인민의 나라도 아니었다”

▲ 바른미래당 이종철 대변인(사진제공 뉴시스)
[스페셜경제 = 김영일 기자]여기 평범하지 않은 이력을 지닌 정치인이 있다. 피 끓는 20대 시절에는 북한 지도이념인 주체사상을 지지하는 주사파 운동권이었고, 가정과 사회에서 기반을 닦는 나이인 30대에는 무료로 소외계층의 집을 수리해주거나 탈북 청소년들과 대학생들의 자매결연을 맺어주는 자원봉사 활동 및 북한 인권운동에 전념했으며, 세상일에 현혹되지 않는다는 40대 중반에 들어선 어려운 소외계층에 실질적 도움을 주기 위해 정치권에 뛰어든 바른미래당 이종철 대변인이다. 


‘주사파 운동권→전향→자원봉사 및 북한 인권운동→정치인’ 등 순탄치 않은 인생역정을 걸어온 이 대변인은 하늘의 명을 깨닫는다는 50대엔 ‘북한 동포들의 인권과 남북통일 그리고 더 나은 대한민국을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해 보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고자 하고 있다. 이에 <스페셜경제>가 제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 바른미래당 이종철 대변인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 들어봤다.

 

전향 이후 자원봉사 및 北 인권운동 전념

文 정부, 北 지나친 믿음…제재·대화 병행

 

다음은 이종철 대변인과의 일문일답이다.


Q : 북한 지도이념인 주체사상을 지지하는 주사파 운동권이었던 전 고려대 총학생회장 출신이다. 그런데 지금은 반대 측에 서 있다. 전향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 1996년 ‘연대사태(1996년 8월 13일부터 20일까지 연세대에서 범민족대회와 통일대축전 행사를 열려던 학생들과 경찰이 격렬하게 충돌한 사건)’로 감옥에 갔다. 1998년 봄에 나왔는데 당시 주요 지하운동 그룹이 전환을 하고 있었다. 북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는 논의가 제기된 것이다. 오랜 관찰 속에서 북한이 이른바 ‘주체사상의 나라’도 ‘인민의 나라’도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 나로서도 많은 고민이 되었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갈등과 번민이 컸다. 나의 철학과 신념에 대해 차분하고도 냉철하게 점검하고 확인하고자 했다. 당시 탈북자가 한국으로 대거 들어오고 있었기에 탈북자들을 많이 만났다.

- 1940년~1997년 사이 북한에서 극심한 식량난이 발생했고 식량을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넘어간 사람들이 한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2018년 말까지 국내 입국 탈북자 수가 3만 2476명인데 당시 한 해 수백 명씩 들어오다가 2000년대 초부터는 천명이 넘게 들어왔다. 수많은 탈북자들과 만나 직접 이야기 하며 많은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검증을 하였다. 최종적으로 생각을 전환하게 되었다.

Q : 정치권에 주사파 선·후배들이 많을 텐데, 그들로부터 배신자 또는 변절자로 낙인 찍혀 이종철 대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 잘 알려진 정치인들로는 민주당에 많이 있고 과거 통진당이나 현 민중당에서 여전히 많이 활동하고 있다. 7~8년 동안 함께 투쟁하며 맺고 쌓아온 동기, 선후배 등 수많은 인연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외톨이가 되었다. 대학시절을 비롯해 젊은 날 만들어진 관계들이 거의 다 단절이 됐다.

Q : 전향 이후에는 탈북자를 돕는 시민단체에서 활동한 것으로 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나?

- 대학을 졸업하고 크게 보면 두 가지 방향에서 활동했다. 한 방향은 자원봉사 운동이다. 지역을 거점으로 풀뿌리 공동체 시민운동을 했다. 강서구와 양천구를 포괄하는 지역 시민단체 대표를 하며 수많은 자원봉사 활동을 펼쳤다. 대표적으로 무료로 집을 고쳐주는 활동을 ‘재능 기부’를 통해 진행하였고 약 200가구 정도 집수리를 진행했다. 열악한 비인가시설이나 독거노인, 한 부모·장애우 등 저소득가정의 집을 깨끗하게 수리하고 새 단장하였다.

- 북한에서 온 탈북 아동 청소년들과 남한의 대학생 언니와 형들을 1:1로 멘토-멘티 자매결연 맺어주는 활동도 했다. 대학생 멘토가 주로 과외 수업 등 공부를 가르쳐 주며 탈북 아동 청소년 멘티의 남한 정착을 돕도록 하는 활동이다.

- 그 외에도 장애인들의 치아를 무료로 치료해 주는 사업 등 많은 활동을 했고 정말 헌신적인 많은 자원봉사자들과 많은 땀을 흘렸다.

-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 인권 운동을 했다. 앞서의 활동이 지역에서의 활동이라면 북한 인권 관련 활동은 일종의 중앙 및 전국 단위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한 인권 캠페인 활동도 하고 ‘대북방송’을 만들어 북한을 향해 전파를 송출하는 활동도 했다.

- 조금은 다른 영역일 수 있는데 ‘한국 현대사’를 균형 있게 보게 하는 운동도 했다. 수많은 종류의 중·고등학교의 역사 교과서를 가장 많이 보고 가장 잘 분석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자부한다. 한국 사회에 많이 퍼져있지만 좌우 편향된 지식 정보들을 좀 더 객관적으로 고치는 ‘신지식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Q : 탈주사파이면서 탈북자를 돕는 시민단체 출신이라 문재인 정권의 대북정책을 보는 시선이 남다를 것 같다. 제1야당은 ‘김정은 수석대변인’, 집권여당은 ‘중재자’ 또는 ‘촉진자’라고 한다. 문재인 정권의 대북정책, 어떻게 보나?

- 북한에 대해 우리는 매우 현실적인 생각을 해야 한다. 크게 보면 ‘제재’ 일변도의 정책과 ‘화해’ 일변도의 정책 양자의 한계를 지양하고 양자의 교훈점을 바탕으로 재정립해야 한다. 북한은 제재로서 굴복시킬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그러려면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결의가 있을 때이다. 아니면 중국이나 러시아를 확실히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제재만으로는 풀 수 없다.

- 결국 북한이라는 나라에 일정 정도 끌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숙명인 셈이다. 북한은 ‘치킨게임’에 매우 익숙하고 능숙하다. 오랫동안 전략적으로 체화되어 있으며 ‘벼랑끝 전술’을 통해 생존을 도모해 왔다. 북한은 독재국가이고, 남한이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또한 가능하다.

- 이런 조건에서 우리는 대화를 통해 유도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최대한 이끌어 내는 노력을 해야 한다. 제재도 물론 병행해야 한다. 말하자면 양자를 병행하며 꾸준히 관리하고 견인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은 이런 면에서 형태상은 비슷할 수 있다.

- 그런데 북한에 대한 일종의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게 문제다. 북한을 선의의 대상으로만 인식한다. 한반도 문제도 북한이 주장하듯이 한국과는 화해하며 잘 지낼 수 있는 데 미국 때문에 안 되는 것이라고 보고, 미국과의 관계만 풀리면 한반도 평화 체제는 저절로 이루어질 것처럼 생각한다.

- 그러다 보니 대한민국 안보에 대해 철저하지 못하다. 북한 눈치 보기가 심하게 나타난다. 북한 김정은에 대해 선의로 다가가면 선의가 돌아올 것이라는 지나친 믿음에 사로잡혀 있다 보니 김정은이 핵도 쉽게 포기할 것처럼 생각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인식은 적잖이 편향되어 있고 행동은 매우 조급하다. 이런 점을 극복해야 한다.

- 북한도 예전 같지 만은 않다. 김정은이 김정일과 다른 점도 분명히 있다. 북한을 꾸준히 견인하면서 북한 내부의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북한 내부에서 변화를 추동할 큰 동력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결국 남북관계는 계속 이렇게 갈 수밖에 없다. 제재 일변도의 정책 혹은 제재 우위의 정책으로 북한을 접근하는 것보다 제재와 대화의 병행을 통해 북한 내외적으로 다양한 지점에서 효과를 내도록 하는 끈질긴 노력이 필요하고, 어렵지만 이것이 가장 현실적이라고 본다.

- 안보는 죽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에 안보에 있어서만큼은 한 치의 양보나 빈틈이 있어서는 안 된다. 앞서 제가 얘기한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지금의 자유한국당이 말하는 거나 더불어민주당이 말하는 것과 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정책 기조를 지지할 건 지지하면서 견인할 건 견인해 가야 한다고 본다.

Q : 최근 북한 김정은 정권에 반하는 자유조선(옛 천리마민방위)도 탈북자들을 돕는 단체라 설명하고 있는데, 자유조선에 대해선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 최근 부상하고 있는 ‘자유조선’에 대해 물어 보았는데, 북한 인권 운동을 하면서 많은 단체들과 교류하고 연대했지만 사실 자유조선 그룹과는 유대가 없었다. 이 조직이 과거 ‘링크’라는 조직과 관련이 있다고 알고 있는데, 링크 조직은 주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하는 조직이었고 간접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 조직이 북한 인권을 위해 활동을 하고 국제적 차원에서 활발하게 조직세를 키운 건 대단하다고 평가할 만하다.

- 추후 자유조선으로 발전한 것 같은데 최근 자유조선이 보이는 방식을 볼 때는 얼마나 실질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스페인 대사관을 습격한 것은 결코 바람직한 활동이 아니다. 북한 인권 운동은 철저히 국제적 상식과 국제법을 준수하며 이루어져야 한다. 북한 내에서가 아니라 북한 밖에서는 절대 불법적인 활동을 하면 안 된다.

- 또한 위험한 활동도 최대한 자제하는 것이 좋다. 조직 운동의 기본을 충실히 지키지 않으면 운동의 본의가 훼손될 수 있다. 북한 내부를 변화시키는 게 목표라면 북한 내부로 침투해야 하고 그러려면 외부적으로는 절대 이런 연관성을 드러내면 안 된다.

- 그런 면에서 북한 내부와 연계를 갖고 실질적인 역할을 하려고 하는 조직인가 의문이 드는 것이다. 비밀결사조직을 표방한다면 철저히 그런 방향에서 자신을 위장하여야 하고 또 활동해야 한다. 그러면서 결정적 시기를 준비해야 한다.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현재까지는 자유조선의 활동력에 한계가 있어 보인다.

 

“서울 강서구에 신선한 바람 일으키고 싶어”
“사드 도입 찬성’ 제일 먼저 밝힌 성주 사람

 

Q :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다 정치권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 20대에 학생운동을 했고 30대는 시민운동을 했다. 40대까지 약 18년 동안 시민운동을 했는데 북한의 인권과 남북통일을 위해 제도적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좀 더 구체적인 대응을 위해서는 제도권에 들어가 수권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44세에 정치에 뛰어들었다. 어느덧 49살이 됐다.

- 앞으로 10년 정도가 대한민국에 매우 중요할 거라 본다. 안으로는 경제 문제와 4차산업혁명의 큰 도전을 잘 대처해서 대한민국이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느냐의 기로에 있다. 남북관계에서도 중대한 국면을 맞을 것이라 생각한다. 꼭 국회의원이 되어서 제대로 역할을 하고 싶고, 새로운 시대를 대비할 수 있는 역량 있는 세력을 형성하고 싶다.

Q : 지난 2016년 4·13 총선에선 서울 강서갑 지역 예비후보로 등록했다가 낙마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내년 21대 총선에 재도전할 계획이 있나?

- 강서구에서 재도전하려 한다. 지난 총선에서 강서구가 갑, 을, 병으로 나뉘었다. 갑에서 네 개동, 을에서 세 개동이 따로 병이 되었다. 현재는 병 지역에서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염창동, 가양3동, 등촌1동.2동, 화곡본동.4동.6동이다. 지하철 9호선을 따라 여의도와 강남으로 출근하는 젊은 직장인들이 조금 부담이 덜 가는 지역을 찾아 정착한 특이한 곳이다.

- 신혼부부가 많다. 서울에서 정치 풍향을 가늠할 수 있는 최적의 지역이 아닐까 싶고, 최대 격전지가 될 거라는 생각이 된다. 좋은 경쟁을 통해 좋은 정치의 모범 지역이 될 수 있도록 신선한 바람을 한 번 만들어 보고 싶다.

Q : 사드가 들어와 있는 경북 성주가 고향이고 대구에서 학교를 다녀 영남으로의 출마 권유를 많이 받을 것 같은데?

- 제가 경상북도 성주에서 태어나서 대구에서 초중고를 나왔다. 성주에는 85세의 아버지께서 지금도 농사를 짓고 계시고 친인척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성주에 사드가 들어올 때 ‘성주 청년 이종철이 부모님께 드리는 편지’를 발표하는 등 ‘사드 도입 찬성’을 제일 먼저 밝힌 성주 사람이 됐다. 그때 비난을 굉장히 많이 받았다.

- 시골 형님께서도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저 역시 아버지께서 참외농사를 지어 대학까지 갈 수 있었다. 당시 ‘사드 참외’라면서 난리가 아니었다. 사드 전자파에 ‘청정 참외’가 ‘전자파 참외’로 전락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거짓이며, 청정 참외도 지키고 대한민국 안보도 지키는 성주를 위해 헌신하고 싶다는 애착이 있다. 지금도 종북세력이 성주 소성리를 거점으로 ‘사드 가고 평화 오라’고 외치고 있다. 이런 현실이 안타깝다.

- 대구에서는 고등학교 때 야간자습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늘 서문시장을 가로질러 갔다. 늦은 시간까지도 자판을 걷지 않고 계신 할머니들을 보며 장래 법관이 되어 오로지 어려운 분들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지난 총선에서 대구로 출마하라는 권유를 직간접적으로 강하게 받았다. 그러나 좌고우면하지 않고 강서구로 나갔다.

- 나중에 실패하고 보니 그때 대구로 갔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성주와 대구는 애착이 가는 고향이지만 제가 있을 곳은 강서구다. 어려운 싸움이 되겠지만 지난 번 총선 때의 혈기처럼 변함없는 초심으로 다시 한 번 도전장을 던져 보겠다.

 

▲ 바른미래당 이종철 대변인<사진=국회기자단(가칭)>


Q : 바른정당 대변인을 거쳐 바른미래당 대변인까지, 오랜 기간 대변인직을 맡고 있다. 대변인의 매력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반대로 대변인의 고충은 무엇인가?

- 대변인으로서 많은 경험을 했다. 바른정당에서 8개월, 바른미래당에서 10개월 해서 1년 반이다. 짧지 않은 기간이고 큰 행운이다. 당의 중심 혹은 정치의 중심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아마도 대변인만큼 매력적인 직위는 없을 것이다. 국회의원들도 서로 하고 싶어 하는 당직이다.

- 정치인은 청와대나 정부로 가거나 국회를 통해 활동한다. 국회에매서 활동하는 국회의원들은 입법 활동이 기본이지만 정치인은 기본적으로 법이나 정책을 만드는 것과 함께 시대와 세상을 바꾸고 물길을 잡아가는 정치를 해야 한다. 즉 사회의 즉시적인 사안, 다양한 논쟁과 논점들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여론을 만들고 주도하는 역할을 같이 해야 한다. 대변인을 하면 바로 후자의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 당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지만 가장 전면에서 정치 활동을 하고 국민의 목소리를 전하는 것이다. 처음에 권력자에게는 천둥과 같고 국민들에게는 시원한 소나기 같은 목소리를 대변하겠다고 다짐했었다. 매우 벅차고 보람 있는 일이다. 대변인으로서도 많은 경험을 했고 많은 것을 배웠다. 시민운동을 하는 것이 좀 비슷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한 바 있어 더 신심을 갖고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사명감과 소명의식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다. 이런 점이 대변인만이 지닌 매력이다.

- 한편으로 대변인은 결코 개인이 아닌 당의 목소리이기 때문에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당 지도부의 생각과 판단, 당 정책에 대해 늘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하고 어긋남이 있어서는 안 된다.

- 신속성도 매우 중요하다. 사안이 나왔을 때 가장 빠르게 입장을 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다방면의 많은 주제들에 대해 늘 공부를 해 둬야 한다. 각 이슈들을 충분히 파악하고 꿰뚫고 있어야 한다. 내용도 정확하면서도 개성이 있어야 한다. 적재적소의 용어를 빠르게 고를 줄 알아야 한다. 절대 실수가 있어서도 안 된다.

- 긴박한 상황에서도 신중함을 잃지 않고 정확한 입장을 내야 한다. 매우 집중력이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늘 대기 상태다. 이런 게 고충이라면 고충이다. 잘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많이 갈고 닦고 노력을 해야 한다.

Q : 대변인의 여러 역할 중에 하나가 논평 작성인데, ‘진보에서 진보하라’, ‘국제관계의 이해’, ‘나의 고백’, ‘파란만장 코리아 오매불망 대한민국’ 등 책도 4권이 냈다. 언제부터 글 쓰는 재주가 있다는 걸 발견했나?

- 한 권을 빼고는 다른 분들과 함께 필요해서 쓴 책들이다. 사실 글을 많이 썼는데 책을 못냈다. 오랫동안 칼럼을 많이 썼다. 개인적으로는 흘러간 글들이 굉장히 많다. 꿰지 못한 구슬이 서말이다.

- 따로 글재주가 있다기보다 그냥 썼다. 초·중·고등학교 때 글짓기 상을 많이 타기는 했다. 작가로 한 번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나 그만큼의 재능은 안 되는 것 같다. 작가 수준의 글 솜씨는 안 되고 익혀서 경지에 도달하는 데도 한계가 있는 것 같다. 두 가지 일을 욕심내기도 참 어려운 것 같다. 어느 정도 논리적인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은 스스로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Q : 존경하는 또는 닮고 싶은 위인이 있다면?

- 우리나라 국민들이 다 비슷하기에 좀 싱거울 수 있는 데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의 면모를 늘 떠올린다. 지금까지 최다 관객 기록을 가기고 있는 영화 ‘명량’을 가끔 다시 본다. 이순신 장군의 명대사가 정말 많은 데 그 중에서 제게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아직도 살고자 하는 자가 있다니, 통탄을 금치 못할 일이다!” 라고 하는 부분이다.

- 이어지는 대사가 대강 이렇다. “아직도 살고자 하는 자가 있다니, 통탄을 금치 못할 일이다!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정녕 싸움을 피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냐, 항복한다고 무사할 듯 싶으냐? 똑똑히 봐라! 더 이상 살 곳도 물러설 곳도 없다! 목숨에 기대지 마라! 살고자 하면 필히 죽을 것이고, 또한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니 병법에 이르기를 한 사람이 길목을 잘 지키면 천 명의 적도 떨게 할 수 있다 하였다. 바로 지금 우리가 처한 형국을 두고 하는 말 아니더냐!” 여기서 ‘사즉생 생즉사’의 유명한 말이 나온 것이다.

-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이순신이 아들 이회와 나누는 대화가 인상적이다. 이회가 울돌목의 회오리를 이용할 생각을 어찌 하였느냐고 묻자 “천행(天幸)”이었다면서, 회오리가 아니고 백성을 두고 천행이라는 것인가 하는 물음에 “너에게는 무엇이 천행이었겠느냐”고 되묻는다.

- 세종대왕은 대학원을 다니며 세종실록 원서(번역서)를 읽게 되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세종실록을 보면 세종이 신하들과 끊임없이 토론하고 논쟁하는 것이 나온다. 누가 왕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어떤 결정을 하기 위해 많은 반대가 있고 많은 토론이 있는 것을 본다. 세종대왕은 그런 토론과 설득을 통해 그 많은 업적을 이루어 낸 것이라는 점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백성에 대한 사랑과 성실한 노력 같은 세종대왕의 면모를 늘 떠올려 본다.

Q : 끝으로 <스페셜경제> 독자들과 강서구 주민들께 한 말씀 부탁드린다.

- 예전에 소외계층에 대한 무료 집수리 사업을 하며 가양동, 염창동, 등촌동, 화곡동 곳곳을 누볐다. 가양동과 등촌동 임대아파트에 도배·장판을 새로 해드리는 데 집안의 짐을 빼며 참 많은 것을 느꼈다. 어려운 분들이 버리지 못하고 좁은 집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물건들을 모아놓고 사시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 염창동에 아파트가 대거 들어서기 전에 독거노인들이 거주하는 쪽방 같은 곳이 많았다. 화곡동도 빌라의 반지하에 사시는 어려운 분들이 여름이면 비 걱정을 하셨다. 30대 젊은 날을 이곳에서 땀을 쏟았다.

- 현재 이 지역에서 전·현직 다 따져도, 국회의원 후보로 거론되는 사람 중에 저처럼 봉사를 한 분은 없다. 봉사와 국회의원이 되는 건 다른 것 같다. 꼭 국회의원이 되어 30대 봉사할 때처럼 지역을 누비고 어려운 이웃의 손을 잡고 실제적인 도움을 드리는 사람이 되겠다. 아이들의 꿈과 희망이 영그는 멋진 강서구를 만들고 싶다.

- 제가 국회의원이 되고자 하는 것은 죽는 날까지 뜻을 좇아서 살고자 하는 것, 시대의 대의와 나라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생애로 마감하고자 하는 제 평생 삶의 지론 때문이다. 20대 때 세상을 알고 정의를 위해 살고자 했던 초심대로 북한 동포들의 인권과 남북통일 그리고 더 나은 대한민국을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해 보고 싶다.

- 강서구 주민들께서 제게 꼭 기회를 주시면 감사하겠다. 강서구 주민들과 스페셜경제 독자님들께 늘 건강과 행운을 기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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