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락 징조 포착…“논의된 바 없다”→“적임자라 판단할 만” 여운
4대 그룹 오너 회동 주선…ESG 표준화에도 강한 의지 드러내
1~3세대 아우르는 교분에 대·중·소기업 아우르는 이해 갖춰
정부여당과 우호적 관계도 이점…재계 “구심점 역할로 충분”

▲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 24일 전라북도 군산에 위치한 로멀라이즈 타운을 찾아 청년 소셜벤처 창업가들과 토론을 벌이고 이들의 제품과 서비스를 체험하며 조언했다. 사진은 청년 창업가들과 질의응답을 갖는 최 회장 (사진=SK그룹) 

[스페셜경제=변윤재 기자] “우리 기업들이 덩치를 키우고 이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경제발전에 기여했다는 긍정적 시선도 있지만 부정적 인식 역시 컸던 것이 사실이다. 기업인으로서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있으며, 큰 책임감도 느끼고 있다.” (1030일 인문가치포럼)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측정과 표준화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부분인 만큼, 기업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함께 끊임없이 논의하고 고민해가며 발전시켜야 한다.”(1028VBA 2020 코리아 세미나)

 

“CEO들은 파이낸셜 스토리를 실행하면 더 큰 성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이제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1023CEO세미나)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부쩍 책임론을 강조하고 있다.

 

2016년부터 최 회장은 근본적 혁신(딥 체인지)을 강조하며 사회적 가치 실현에 관심을 드러내왔다. 당시엔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에 방점이 찍혔던 만큼, 사회공헌의 진화형에 가까웠다.

 

그러나 최근 2년 간 그의 책임에는 역할에 대한 열망이 느껴진다. 지난해 사상 첫 사회적 가치 민간 축제인 SOVAC을 시작하는 등 사회적경제의 질적·양적 향상을 도모하면서 결이 달라졌다.

 

최 회장이 말하는 책임의 무게는 외부에 쏠려 있다. ‘다양한 이해관계자를 강조하며 시대의 변화에 기업이 발맞춰야 한다고 거듭 역설하면서 그는 선봉대를 자청 중이다. 주력 계열사인 SK텔레콤과 SK하이닉스를 포함한 8개사가 한국 최초로 RE100 가입한 게 그 예다.

 

이에 따라 대외 행보의 보폭도 한층 넓어졌다. 올해 들어 SK를 비롯해 삼성, 현대차그룹, LG 등 우리나라 재계를 움직이는 4대 그룹 오너들의 회동이 잦아졌다. 연초에는 이미 하반기 일정까지 빼곡하게 짜인 이들이지만, 하반기에만 9월과 11월 두 차례나 만났다. 이 자리를 주선한 이는 바로 최 회장. 사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국정농단 재판 과정에서 이들의 친분이 언급되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지만 이들의 만남이 수면 위에 떠오른 적은 없었다.

 

최 회장의 행보는 비단 재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기업의 경영과 직접적 연관관계가 없는 자리에도 직접 참석해 강연자로 나서고 있다. 최 회장은 지난달 21세기 인문가치포럼 참석을 위해 경상북도 안동까지 내려갔다. 1시간 반 기조강연에 이어 특별대담까지 소화했다.

 

물론 행복나래재단이 지원하는 전통리조트 구름애에서 열린 행사이기는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로 대외 활동을 최소화했던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행보였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전기차 배터리 협력을 논의하거나 문재인 대통령의 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 방문을 예방하는 등 기업 오너로서 역할했었다. 더욱이 일주일 전 그는 CEO세미나를 마무리했던 터라, 본격적인 임원 평가와 내년도 사업 계획의 큰 구상을 그리기 시작한 터였다.

 

특히 최 회장은 이 자리에서 기업도 다양성과 공감을 바탕으로 새로운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저 역시 기업인으로서 다양한 이해관계자를 대상으로 한 책임과 역할을 다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기업에 주어진 새로운 책임과 역할을 적극 실천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대한상공회의소 차기회장설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던 미묘한 시점에 역할론을 꺼내든 것은 최 회장이 사실상 회장직 수락의사를 밝힌 것이라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현재 재계에는 이 사실상 사라진 상황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박근혜 정부 당시 기업경영과 무관한 역사 논쟁 등에 발을 깊숙하게 들여놓으면서 시민사회진영에서 관변단체라는 비판이 제기됐었다. 이후 국정농단 사태에 연루된 사실이 밝혀지면서 전경련의 위상과 신뢰는 급격히 떨어졌다. 삼성과 현대차, SK, LG 등이 잇따라 전경련을 탈퇴했고, 청와대는 소통창구를 전경련에서 대한상의로 갈아탔다. 차기 전경련을 노리는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노사관계에 치중해왔기 때문에 재계 관련 연구와 같은 전문성을 좀더 보완하는 단계다. 대한상의는 대기업부터 중소기업까지 다양한 회원사들이 망라됐지만 해외 네트워크는 전경련보다 약한 편이다.

 

때문에 공정경제 3법이나 노동조합법 개정 등 정부·여당이 반기업법을 입법화하겠다고 밀어붙여도 재계의 항변을 먹혀들지 않는 실정이다. 경총과 전경련, 대한상의는 각개전투를 벌일 뿐, 합치된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있다. 국회에 관련법 입법을 신중히 해 달라는 의견서를 전달할 때도 경총과 전경련은 함께 했지만, 대한상의는 빠졌다. 전쟁을 하는데 장수가 없는 상황이 된 셈이다.

 

입법 압력 외에도 재계가 직면한 대내외 불확실성은 거세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생존이 제1 관심사가 됐고, 미국과 유럽에서는 점차 환경과 노동, 인권 등에 대한 요구가 강화될 전망이다. 한국을 둘러싼 지정학적 변수는 복잡해졌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으로 시작된 중국과의 불편한 관계는 미중 무역갈등으로 한층 꼬였고, 강제 징용 배상을 둘러싼 일본의 수출 규제는 정권의 정체성과 직결된 문제라는 점에서 쉽게 풀리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을 비롯해 신북방·신남방과의 경제협력체제 구축에 나섰지만, 아세안에서 아직까지 한국의 위상을 공고하지 못하다. 때문에 정부에 세계 각 국의 기업 관련 규제의 수위와 내용을 풀어줄 것을 적극적으로 건의할 인물이 절실하다.

 

오너들이 직접 만나 경영 현안에 대해 논의할 정도의 상황이지만 합일된 목소리를 만들 단체는 보이지 않는다. 최 회장은 이와 같은 상황으로 인해 역할에 대해 고민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9월까지만 해도 SK와 대한상의에서는 적극적으로 제안 받은 바 없다”(SK) “아직 구체적으로 검토된 바 없다”(대한상의)로 선을 그었지만, 최근에는 미묘하게 바뀌었다. SK관계자들도 오너의 심중을 우리가 알 수 있겠냐. 아직 그룹에 할 일이 많다면서도 연륜으로 보나 사회적 가치 실현에 대한 소신을 고려하면 적임자라고 판단할 만 하다고 가능성을 열어놓는 분위기다.

 

역할에 대한 최 회장의 의지도 상당해 보인다. 그는 지난달 SK그룹 CEO세미나에서 이젠 매력적인 목표와 구체적 실행 계획이 담긴 파이낸셜 스토리가 시장으로부터 신뢰를 얻어야 기업가치가 높아지는 시대로 변화하고 있다CEO가 직접 공감대 형성에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같은달 VBA 2020 코리아 세미나에서는 “ESG는 새로운 규칙이며,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함께 끊임없이 논의하고 고민해가며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리고 며칠 뒤 21세기 인문가치포럼에서는 역할론을 언급했다.

 

재계에서는 최 회장이 회장직 수락에 마음을 굳혔다는 관측이 나온다. 실제 최 회장은 연초 박용만 회장으로부터 회장직 제안을 받았을 때 고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가능성을 전제로 의견을 구하고 있다는 게 재계 관계자의 전언이다.

 

특히 최 회장은 무게감에서나 경륜 등에서 가장 적임자로 손꼽힌다. 1960년생인 최 회장은 재계 3세 가운데 회장으로서 재임기간이 길고, 1세대부터 3세대까지 두루 아우르며 교류하고 있기도 하다. 그룹의 건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수펙스추구협의회도 자리잡아 최 회장이 외유를 하더라도 경영 공백을 메울 수 있다. 석유화학부터 반도체까지 다양한 산업군에 걸쳐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시야가 넓은데다 사회적 가치 실현을 기치로 세운 이후부터 중소·중견은 물론, 소상공인까지 이해가 깊어졌다는 평가다. 더군다나 최 회장은 정부·여당과 비교적 우호적관계다. 기업 관련 정책의 방향을 놓고 협력과 대립 사이에서 줄타기해야 한다는 점에서 상당한 이점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재계에서는 이번주 SK 임원 인사가 단행되는 만큼, 최 회장의 회장직 수락 여부도 일정 부분 반영되지 않겠느냐는 추측이 제기된다. 이와 관련, SK이노베이션, SK하이닉스, SK텔레콤 등 주력계열사 최고경영진 유임시켜 안정을 꾀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수펙스추구협의회의 경우, 전략위원회, 에너지·화학위원회, ICT위원회, 인재육성위원회, 글로벌성장위원회, 소셜밸류위원회, 커뮤니케이션위원회 등 7개 위원회로 유지하되 ESG 경영 기조를 반영해 일부 위원회의 명칭이 바뀔 가능성이 점쳐진다. 또 각 위원장도 교체 가능성이 점쳐진다.

 

스페셜경제 / 변윤재 기자 purple5765@speconomy.com

저작권자 © 스페셜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