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도 모르게 날인한 도장…책임명의는 ‘나몰라라’
교육부는 모르쇠 일관…김상곤 전 장관 “적법한 진행, 수정안은 유효”

 

▲ 2016년 서울역사박물관은 1904~1905년까지 로이터 통신원과 미국공사관 부영사를 지낸 윌러드 스트레이트가 촬영하고 수집한 서울사진을 모은 '코넬대학교 도서관 소장 윌러드 스트레이트의 서울사진'을 발간했다. 사진은 을사조약 기념사진.


[스페셜경제=김수영 기자] 1905년 11월17일은 고종 황제가 이끌던 대한제국이 을사오적의 주도 하에 일제에 의해 외교권을 박탈당한 치욕의 날로 기록돼 있다.

당시 대한제국 내에서 유일하게 외교권을 보유한 고종 황제가 2차 한일협약(을사조약·을사늑약)을 끝까지 거부하자 일본은 외부대신 박제순의 직인을 가져다 날인해 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을사늑약이 외교권이 없는 날인이고, 설령 박제순의 날인이 효력이 있다 해도 고종 황제의 비준이 없었으므로 원천무효라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와 비슷한 일이 불과 몇 년 전 일어났다면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지난해 3월 교육부가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교과서 수정과정에 직접 개입해 200곳 넘게 대거 수정하고 서류까지 위조한 사실이 알려진 바 있다.

문재인 정권이 출범했던 2017년 9월경, 당시 교과서 집필 책임자로 있던 박용조 진주교대 교수에게 교육부 교과서정책과장으로 있던 A씨가 연락해 ‘대한민국 수립’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고쳐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박 교수가 이를 거부하자 A씨 등은 박 교수를 수정과정에서 배제시킨 뒤 그의 도장을 도둑날인 한 것도 모자라 협의 과정에 참여한 것처럼 꾸며 박 교수 명의로 교과서를 수정했다.

이 같은 사실은 지난해 집필 책임자인 자신도 모르게 교과서가 수정된 것을 알게 된 박 교수의 폭로로 세상에 알려졌다.

최근 검찰은 위 사안과 관련해 교과서 불법수정을 지시한 혐의(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사문서위조교사 등)로 당시 교육부 교과서정책과장으로 재직했던 A씨와 교육연구사 B씨 등 2명을 불구속 기소했다고 밝혔다.

관련 논란이 처음 불거졌을 당시 교육부는 “편찬기관과 발행 출판사 간 벌어진 일”이라며 연관성을 부인했지만 검찰은 모든 과정을 교육부가 지휘한 것으로 판단했다.

 

◆ ‘정부 수립’ vs ‘대한민국 수립’…무슨 차이 있나?


박 교수는 25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2015년에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대한민국 수립’으로 수정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수차례 거절했다”며 “집필기준이었던 ‘2009교육과정’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명시돼 있었기 때문”이라 밝혔다.

이번에 교육부가 수정을 요청했던 내용 중 하나인 ‘대한민국 수립’은 새로운 기준인 ‘2015교육과정’에 따라 지난 2016년 수정된 내용이다.

이 같은 문제는 ‘대한민국 건국’의 정통성을 북한과 갈라선 1948년이 아닌,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비롯된다. 주로 보수진영에서는 북한을 제외하고 단독정부를 수립한 1948년을 건국일로 보는 반면, 진보진영에서는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을 건국일로 바라본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7년 8·15 경축사에서 “2년 후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다. 내년 8·15는 정부수립 70주년이기도 하다”라며 “새로운 100년의 준비에 다 함께 동참해 주실 것을 바란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72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2017.08.15.

 

 

◆ 수정 내용만 200여 건모두 근현대사에 집중


교육부가 수정한 내용은 이 뿐만이 아니다. 교과서에는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라는 대목도 사라지고, ‘북한이 여전히 한반도 평화와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는 부분까지 통째로 들어냈다.

박정희 정권(1963~1979)에 대한 서술은 ‘유신체제’에서 ‘유신독재’로 바뀌고, 장면 내각이 기획했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한국이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을 이뤘음을 의미하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표현도 빠졌다.

반면 민주화 과정 설명에 대한 분량은 12페이지에서 24페이지로 두 배 늘었다. 여기에는 촛불집회에 대한 소개까지 포함돼 있었다.

또한 ‘일본군 위안부’라는 표현도 명시적으로 포함됐다. 이전 교과서에도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은 있었지만 초등학생들이 보기에 적절치 않다는 이유로 해당 단어가 직접 거론되진 않았다.
 

◆ 민원 조작부터 학자 양심 무시한 도용 날인, 서류위조까지

법무부가 지난 24일 국회에 제출한 공소장에 따르면 A과장은 2017년 9월 6학년 사회교과서 내용 수정을 위해 B연구사에게 “관련 민원이 있으면 (교과서)수정이 수월하다”고 말했고, B연구사는 평소 알고 지내던 교사 C씨에게 “1948년 ‘대한민국 수립’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바꿔달라는 내용의 민원을 국민신문고에 접수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C씨가 요청받은 민원을 접수시켰고, 이를 근거로 교과서 수정작업이 진행됐지만 집필 책임자인 진주교대 박용조 교수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과서를 고칠 수 없다”며 수정을 거부했다. 학자로서의 양심선언인 셈이다.

교과서 수정을 위해서는 먼저 교육부에서 민원을 제기하고 수정사항을 발행사와 편찬기관에 전달한다. 이어 발행사와 편찬기관이 집필진 협의를 통해 내용을 수정하고, 수정·보완된 내용을 신구대조표를 작성해 교육부에 승인 요청을 하고 교육부의 최종 검토·승인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러나 법무부가 제출한 공소장에 따르면 교육부의 A과장과 B연구사는 교과서 출판 담당자에게 교과서 수정을 위해 편찬기관이 먼저 수정을 요구한 것처럼 협의록을 위조하라는 지시까지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책임자로 있던 박용조 교수가 수정을 거부하자 박 교수가 협의과정에 참여한 것처럼 그의 도장까지 ‘도둑날인’했다. 현재 A과장은 박 교수가 이러한 사실들을 폭로하기 한 달 전인 지난해 2월부터 해외 교육원 원장으로 근무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수정된 사회 교과서는 전국 6천여 개 초등학교의 43만3천여 명의 학생에게 배포돼 교재로 사용됐다.

지난해 3월19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 출석한 김상곤 전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도 해당 논란에 대해 “본 수정·보완은 교육과정 성취기준과 사회적 요구 등을 반영해 적법하게 진행된 것으로 수정내용은 유효하다”고 발언했다.

검찰은 당시 김상곤 교육부 장관과 차관 등 윗선 지시 및 개입 여부 등에 대해서는 조사하지 않고 담당 공무원 2명만 기소한 채 수사를 종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 朴정부 국정 교과서 진상조사위 출범한 달에 교과서 수정 요구


근현대사와 같이 민감한 과목의 교과서 수정에 대해 교육계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는 높다. 집필진의 성향에 따라 특정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과거 박근혜 정부가 좌편향 역사교육을 바로잡겠다며 국정 역사 교과서 작업을 추진할 때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를 맡고 있던 문재인 대통령이 “획일적 교육을 강요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며 강하게 반대했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2017년 5월 취임 직후 적폐청산 첫 과제로 국정 역사교과서 폐지를 발표했고, 정부여당은 그해 9월 진상조사위를 구성해 국정교과서 사태를 7개월 간 조사하기도 했다.

박용조 교수에 따르면 교육부가 ‘정부수립 부분’의 수정을 요구한 것은 2017년 9월경이다. 정부여당 차원의 진상조사위가 구성될 당시 이미 교육부는 새로운 정부에 맞는 교과서 수정에 첫 삽을 뜨고 있던 것이다.

교육부는 25일 설명자료를 통해 “교과용 도서 규정과 국정도서 위탁계약서에 따라 관련 절차를 진행했고, 발행사가 수정발행 승인을 요청해 승인했다”고 밝힐 뿐 민원조작이나 도둑날인, 서류위조 등에 대해선 어떤 해명도 내놓지 않았다.

 

▲ 자유한국당 전희경, 김한표, 곽상도 의원이 초등 교과서 불법수정 및 특혜채용 의혹 관련 김상곤 전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현 경기도교육연구원 이사장)에 대한 고발장을 접수하기 위해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민원실로 향하고 있다. 2019.06.26.

 

한편 자유한국당은 26일 이번 사안에 대해 거세게 비판하며 김상곤 전 장관을 검찰에 고발했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이날 원내대표·중진의원 연석회의에서 “이 정권의 DNA는 역시 날치기”라며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적폐로 몰면서 교과서 날조라는 거대한 적폐마저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김현아 원내대변인도 논평을 내고 “적폐청산을 잠꼬대처럼 외치면서 자신들의 적폐는 안 보이는 것인가 아니면 눈을 감은 것인가”라며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문 정권이 적폐를 쌓아 못해 이제는 자신들의 잘못을 은폐하며 새로운 적폐를 창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진제공 뉴시스>

스페셜경제 / 김수영 기자 brumaire25s@speconomy.com
저작권자 © 스페셜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