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귀국 닷새 만에 베트남행
불법 승계 의혹·국정농단 재판 앞둬
공백 최소화·내부 동요 다독이기 나서

▲ 이재용(가운데 왼쪽) 삼성전자 부회장이 20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응우옌 쑤언 푹 총리를 예방하고 협력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스페셜경제=변윤재 기자그룹의 총수는 큰 배의 선장과도 같다. 국내외 경영환경과 비즈니스 트렌드를 바탕으로 그룹의 성장 방향을 제시하고 중·장기 사업을 구상한다. 핵심사업과 비핵심사업의 미래 가치를 판단해 투자의 규모와 인력운용의 방향을 정하는 것도 오너의 몫이다. 이처럼 당장의 이익이나 효과보다 그룹 전체의 동력을 육성하고 이어가는 책임을 지고 있는 오너에 대해 ‘큰 그림을 그린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최근 행보는 ‘디테일’에 집중한 인상이다. 경영 변곡점마다 현장을 챙기고 있는 것이다. 


이 부회장은 지난 6월 구속영장이 기각되자마자 하루 동안 반도체와 무선사업부 경영진과 간담회를 갖는 강행군을 펼쳤다. 2분기 잠정 실적을 발표한 뒤에는 삼성전지 부산사업장을 찾아 전장용 적층세라믹콘덴서(MLCC)를 챙겼다. 2분기 경영·투자 설명회가 있던 날에도 삼성전자 온양사업장을 찾아 차세대 반도체 패키징 기술 개발을 살폈다. 검찰이 이 부회장 기소를 강행하자 판매 최전방에 있는 삼성디지털프라자를 찾아 직원들로부터 의견을 들었다. 주한 일본대사를 만나 수출규제 완화의 필요성을 설득했고, 3분기 잠정실적을 발표한 직후엔 삼성준법감시위원회를 찾아 위원들과 만난 뒤 곧바로 해외 출장길에 올랐다. 특히 2주 사이 유럽에 이어 베트남 출장을 강행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로 인한 입국제한이 완화된 것과 별개로 이 부회장의 출장은 위험 부담을 감수한 행보였다. 현재 유럽에서는 코로나19 확진자가 하루 평균 10만명 이상 발생할 정도로 재확산 기세가 꺾이지 않고 있다. 이 부회장의 출장이 이뤄진 10일(현지시간) 네덜란드는 6499명, 스위스는 1487명의 신규 확진자가 발생하며 3월 이후 최다 확진자가 발생했다. 베트남은 강력한 방역으로 확진자 수가 한 자리에 머물고 있지만 지역별로 산발적 발생은 여전하다. 


게다가 이 부회장은 별도의 격리는 없지만 입국 전후로 검사를 받아야 한다. 번거로움을 무릅쓰면서 국내외 현장을 돌아볼 만큼 그룹의 기둥인 삼성전자를 둘러싼 대내외적 상황이 녹록치 않다는 반증이다. 


이 부회장은 2개의 재판을 앞두고 있다. 22일에는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 재판이 시작되고, 26일에는 국정농단 파기환송심이 재개된다. 두 재판의 연결고리는 경영권 승계, 이 부회장으로의 승계를 위해 정권의 실세에 청탁했고, 최소의 비용으로 그룹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조직적 불법행위가 벌어졌다는 논리다.  


이 부회장 측이 절차적 합법성을 강조한다 해도 승계 문제로 유죄를 받았던 만큼, 동일한 사안으로 법정에 서게 된 것만으로 부담이 상당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이번 파기환송심에서는 대법원이 인정한 뇌물죄에 대한 양형도 결정된다. 삼성 안팎에 위기감이 높아지는 이유다. 


대외적 환경도 썩 좋지 않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한 경기 침체는 계속되고 미·중 무역갈등과 이에 따른 제재 공방전으로 불확실성이 지속되고 있어서다. 이런 가운데 각국의 보호무역주의와 환경 규제는 날로 강해지고 IT기업을 중심으로 대규모 인수합병(M&A)이 단행되며 산업 지형을 요동지고 있다. 아베 전 총리의 후계자를 자청한 스가 내각의 우익화는 제2의 반도체 핵심 소재 수출규제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신기술 경쟁이 가속화됨에 따라 특허 괴물로 불리는 특허관리전문회사(NPE)과의 소송도 부쩍 늘었다. 이로 인해 삼성전자는 2·3분기 코로나19 확산세 속에서도 시장 전망을 뛰어넘는 실적을 달성하며 건장한 체력을 과시했음데도 “다음 분기는 예단할 수 없다”며 몸을 사렸다. 


이 부회장은 직접적인 ‘위기’ 언급은 자제하고 있다. “가혹한 위기 상황” “경영환경이 우리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다” “불확실성의 끝을 알 수 없다”며 불안감을 드러냈던 몇 달 전과 달리 현 상황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대신 현장을 더욱 찾았다. 반도체와 전장부품, 무선, 5G(5세대 이동통신) 등 성장 동력을 직접 챙기며 경영 공백을 줄이고 내부 동요를 다독하기 위한 시그널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번 출장은 의미심장하다. 네덜란드엔 미세공정에 필수적인 EUV(극자외선) 노광장리를 제작하는 ASML이 위치해있고, 스위스에는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등 혁신 기술 기업이 자리해있다. AI·자율주행·5G 등 기술 고도화를 타진하고, 파운드리 경쟁자 대만 TSMC를 꺽어 메모리·시스템 반도체 1위를 견인하기 위해 협력을 더 강화해야 하는 곳들이다. 


베트남도 마찬가지다. 베트남엔 스마트폰과 TV, 가전제품 등 삼성전자의 생산라인이 있다. 스마트폰 생산기지는 최대 규모로, 삼성전자가 판매하는 스마트폰 절반 이상이 이 곳에서 만들어진다. 지난 2월부터는 동남아시아 최대 규모의 연구개발(R&D) 센터 건설이 진행 중이기도 하다. 이 부회장은 실제 20일 응우옌 쑤언 푹 총리와 단독으로 면담을 갖고 현지 투자확대 방안을 논의했다. 스마트폰과 가전, 배터리 등이 주 의제로 오른 것으로 전해졌다. 이 부회장은 “수요를 확인하겠다”고 말하며 투자 확대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이 부회장의 ‘초격차 전략’은 성과를 내기 시작한 참이다. 3나노 이하 공정 개발에 돌입한 데 이어 IBM, 엔디비아, 퀄컴 등 대형 고객사의 주력제품 수주에 성공하며 점유율을 늘려가고 있는 파운드리나, 미국 버라이즌과 8조대 계약을 맺으며 시장 주도권을 선점할 기회를 갖게된 5G 통신장비, 친환경 청색 퀀텀닷발광다이오드(QLED) 소자 개발에 성공하며 상용화에 다가선 디스플레이, 소비자의 생활양식을 적극 반영한 맞춤형 제품으로 수요가 늘어난 생활가전 등 모든 분야가 고르게 성장 중이다. 


이를 바탕으로 내년도 사업계획을 수립하고 5년과 10년의 중·장기 목표를 점검해야 할 때, 사법리스크로 삼성전자의 비상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국정농단 재판 당시 이 부회장은  1심에서만 53차례를 포함, 70여차례나 재판에 불려다녔다. 증인 신문이 길어지면서 날짜를 넘기기도 부지기수였다. 이 때문에 집중 심리로 진행됐음에도 첫 공판준비기일부터 선고까지는 170일이 걸렸다. 두 개의 재판이 동시에 진행되며 피고인 출석 의무가 있는 공판 기일이 얼마나 잡힐지 예측할 수 없는 만큼, 재판 준비로 인해 경영 공백을 불가피하다는 지적이다. 이 부회장이 디테일에 집중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스페셜경제 / 변윤재 기자 purple5765@speconom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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